등록 : 2006.10.27 19:08
수정 : 2006.10.27 19:08
사설
1980년대 학생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중국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난 혐의로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미국 시민권자인 사업가 장아무개씨 등 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회합·통신)로 구속·체포했고, 같은 혐의로 2~3명을 추가로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이들이 북한 공작원을 만난 것뿐 아니라 북한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두고 있다고 한다. 전·현직 민주노동당 당직자가 포함됐고, 전 국회의원 보좌관과 시민단체 간부도 연루 혐의가 거론된다.
수사 초기인 만큼 이번 사건의 실체와 구체적인 혐의 내용은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관련자 대부분은 “북한 공작원을 만난 사실이 없다”며 혐의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공안당국도 아직 뚜렷하고 명확한 이적 행위를 입증하지 못한 상태여서, 섣불리 ‘간첩’ 또는 ‘간첩단’으로 단정하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도 사건 관련자들한테는 출신 배경의 공통점만으로 ‘386 운동권 간첩단’이란 딱지가 붙고, 수사당국도 확신하지 못하는 간첩 혐의가 기정사실인 것처럼 언론에 마구 보도된다. 뇌물 사건에서나 볼 수 있는 ‘리스트’가 떠다니고, 이를 근거로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 이름이 거론된다. 핵심 피의자들의 혐의조차 제대로 확인된 게 없는 상황에서 온갖 추측과 설이 난무하는 건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다. 구체적으로는, 사건 관련자들이 과연 북한 공작원을 만났는지, 그리고 이들이 국가안보를 위협할 만한 이적 행위를 했는지를 명백히 가리는 것이다.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지만, 공안사건의 조작과 꿰맞추기 수사 관행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고문과 허위 자백을 근거로 유죄 판결을 받는 일 또한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이번 사건이 “북한 핵실험 정국을 틈타 공안세력이 진보정당을 음해하려는 시도”라며, 발표 시점과 배경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이런 연유다.
분단의 상흔이 짙은 우리 사회에서 간첩이란 딱지가 붙게 되면 사회적으로 매장된다. 공안당국의 일각에서 피의자와 참고인도 구별하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혐의를 은근히 흘려 마녀사냥으로 몰고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혐의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가리는 게 당국의 최우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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