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 중인 순환출자 금지와 출자총액 제한제 축소 방안을 놓고 논란이 무성하다. 규제를 풀어야 할 정부가 오히려 규제를 강화한다는 비판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다른 정부 부처와 열린우리당 의원들까지 길목을 막아서고 있다.안타까운 건, 반대 목소리는 높지만 정작 순환출자의 필요성을 두고 설득력 있는 논리는 찾아보기 힘든다는 점이다. 특히 “기업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권오규 경제부총리의 발상법은 걱정스럽다. 국회에서 반대론자들과의 일전을 앞두고 정부 스스로 원칙을 무너뜨리는 꼴이다. ‘경기가 좋지 않다’, ‘투자를 활성화해야 한다’, ‘경영권 방어가 어렵다’는 식으로 변죽을 울리지 말고 왜 순환출자에 찬성하는지 분명한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규제 해제는 좋지만 원칙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순환출자는 형식상의 출자를 통해 가공자본을 만들어내는 상호출자의 변형이다. 자본을 부풀려 투자자들을 현혹시키고 총수 개인의 지배권을 강화시키는 수단이다. 5% 안팎의 지분을 가진 총수 개인의 이익에 봉사할 뿐 대다수 소액주주의 이익을 해치게 된다. 기업들이 말하는 시장경제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신규 순환출자는 물론 과거의 순환출자도 해소하는 게 원론적으로 맞다. 과거분 해소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유예기간을 두면 된다. 과거 순환출자 해소가 정히 어렵다면 의결권이라도 제한해야 한다. 규제가 없기로 유명한 미국도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저해할 경우 초강경 수단을 동원한다. 기업 담합 행위는 반드시 형사처벌을 하고, 독점 기업을 둘이나 셋으로 강제 분할한다. 1980년대 통신회사 에이티앤티(AT&T)가 8개 회사로 강제 분할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가 벌인 설문조사에서 기업들은 국외로 투자처를 돌리는 이유로 노사문제(54.1%), 입지 및 공장설립 여건(22.8%), 금융 여건(10.3%) 등을 꼽았다. 순환출자 같은 정부 규제 때문에 투자가 어렵다는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환출자 문제는 총수가 있는 몇몇 재벌기업의 관심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작 중소기업들은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정부는 소수 재벌기업이 아니라 모든 기업과 소비자를 정책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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