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2.11 18:59
수정 : 2006.12.11 23:12
사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죽음은 그의 철권통치 희생자들에게서 그를 단죄해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빼앗아버렸다.
1973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미국의 지원 아래 유혈로 전복시킨 피노체트는 집권 기간에 저지른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에 한마디 사죄도 없이 눈을 감았다. 대통령궁을 포격하고 수천명의 정치범을 운동장에 몰아넣어 몰살시키면서 남미 군부독재 시대를 연 그는 74년 스스로 권좌에 오른 뒤 90년 대통령직을 물러날 때까지 국가정보국이란 비밀경찰 조직을 이용해 수많은 정적들과 좌파인사들을 제거했다. 2004년 칠레 진실화해위원회는 그가 집권하는 사이에 3200명 이상이 처형되거나 실종됐고, 수천명이 구금돼 고문을 받거나 망명을 떠났으며, 2만8천여명이 고문을 당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현재 그를 향해 정의를 구하는 반인도적 범죄 사건만 해도 그리말디수용소 고문 사건, 정치범을 납치 암살한 콜롬보 작전 및 콘도르작전 관련 사건, 쿠데타 직후 정적 제거와 관련된 죽음의 카라반 사건 등 여러 건이 있다. 최근에는 집권 때 마약과 무기 밀매에 관여했으며, 2800만달러나 되는 돈을 국외에 은닉하고 있다는 폭로도 나왔다. 정치범 처형과 고문을 담당했던 국가정보국의 마누엘 콘트레라스 전 국장이 그 모든 행위는 피노체트의 승인을 얻고 한 일이라고 증언하는 등 그의 반인도주의적 범죄 연루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그는 한번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
피노체트를 단죄하지 못한 데는 미국과 영국의 책임도 크다. 영국 정부는 98년 스페인 법원의 요청을 받고 런던 경찰이 체포한 그를 1년반이나 끈 뒤 스페인 대신 칠레로 보냈다. 또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아옌데 정권의 외무장관이던 오를란도 레텔리에르 암살사건에 그가 관련된 혐의를 확인하고도 기소 판단을 부시 정부에 미뤄버렸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던 미국 중앙정보국의 수장을 역임한 아버지를 둔 부시가 그를 법정에 세우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피노체트는 반인도적인 범죄에 대한 단죄를 신속하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수많은 악행을 짊어진 채 저세상으로 떠났다. 이제 그가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불가능해졌지만, 역사의 법정은 그의 유죄를 분명히 확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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