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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31 19:03 수정 : 2006.12.31 19:05

사설

섣달그믐 하루 전 이라크를 거의 4반세기 동안 철권통치했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이 처형됐다는 소식이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미국과 영국의 일방적 침략으로 2003년 3월 권좌에서 쫓겨난 후세인은 재임 기간에 이란·쿠웨이트와 전쟁을 벌이고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과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재판에서 극형선고 근거로 삼은 것은 24년 전 발생한 두자일 마을주민 학살사건뿐이었다. 그의 처형을 놓고 한쪽에서는 새로운 이정표가 마련됐다며 환호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미국의 패권에 용감히 도전했다가 정치재판에 희생된 영웅으로 애도하는 등 반응이 크게 엇갈렸다. 이런 인식의 격차에는 팔레스타인 문제, 원유 이권 배분 등을 둘러싼 아랍권과 미국의 오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에 시대착오적 냉기류가 아직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북한과 미국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옛 소련의 해체로 화해협력과 공동번영이 지구촌의 공동 구호가 된 지 오래지만, 이런 기운이 우리 겨레한텐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오히려 안전장치 없이 지속된 전면대치 상태는 북한의 무모한 핵실험 강행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고 왔다. 13개월 만에 다시 열린 6자 회담에서 집중 협의가 이뤄졌지만, 핵문제 타결 일정표를 구체화하지 못했다.

정부·국회·기업·언론에 불신 누적

복잡한 국제문제나 남북관계를 들지 않더라도 누적된 불신이 단절과 냉소주의의 모습으로 일상생활에 얼마나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지 우리는 온몸으로 안다. 지난 한 해 도처에서 막말이 오가고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벼랑끝에 몰려서 스스로 생명을 끊는 극단적 방식으로 항의하는 비극적 사례가 되풀이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구조에 근본적 문제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풍조를 수치로 뒷받침한 것이 지난 연말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이 낸 ‘사회적 자본 확충을 위한 기본조사 및 정책연구’ 보고서다. 공공기관과 민간기관 신뢰도 측정 결과를 보면, 국회가 최하위를 차지했고, 정당·정부·지자체·검찰 차례로 이어졌다. 정치권·정부·지자체에 대한 믿음이 보통 사람이 처음보는 사람에 느끼는 것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민생문제를 제쳐두고 허구한 날 싸움만 하는 국회, 절제되지 않은 말로 푸념만 쏟아내는 노무현 대통령의 독선, 자신의 집을 장만할 꿈조차 못 꾸게 만든 정부의 무사안일한 자세가 국민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을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기관·단체 가운데 두루 국민의 신뢰를 받는 곳이 한 곳도 없다는 점이다. 대기업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조합도 신뢰도 중간값에 미치지 못했다. 일반 시민의 느낌을 종합한 것이니 도식화의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이 또 하나의 권력기관으로 비치고 있는 것이다. 교육기관과 시민단체가 중간값을 넘어서기는 했으나 겨우 턱걸이한 수준이다.

희망 공동체로 바꾸는건 바로 당신

한국 사회가 불신의 수렁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곳은 대학이다.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대학 교수들이 자신의 지적 창작물을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가며 복제하거나 표절하는 관행이 범죄행위로 근절되지 않는다면 상아탑의 존립 근거가 무너진다. 학문의 근본자세에서 의혹의 눈초리를 받는 교수가 어떻게 학문을 지도하고 제자를 담금질하는 권위를 세울 수가 있을까? 이런 풍토에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옛말은 설 자리가 없다.

올해 우리가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할 가장 큰 행사는 대통령 선거다. 선거 분위기의 조기 과열, 편싸움 수준의 발목잡기, ‘아니면 말고식’ 폭로와 흑색선전, 알맹이 없는 이미지 정치 등 나쁜 구태가 그대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선거는 수반되는 부정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주요 쟁점과 과제들을 논의하고 걸러내며 정당성 있는 해결 수단을 찾아내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시민들이 성숙한 의식을 발휘해서 안팎의 쟁점에 관한 토론과 선거운동의 모든 과정을 감시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면 대선은 우리 사회에 겹겹이 쳐진 불신의 장벽에 소통의 바람길을 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꽉 막혀 질식할 것 같은 사회의 냉소·좌절·편가르기를 참여·희망·공동체로 바꿔가는 것은 깨어 있는 시민, 바로 당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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