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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04 17:30 수정 : 2007.04.04 18:58

사설

한국전쟁은 군인 사망자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최초의 전쟁이었다. 군은 적군보다 비무장 민간인을 ‘토벌’하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때로는 ‘작전’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처형’ 차원에서 이루어진 학살이었다. 이렇게 희생된 민간인은 최소 100만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보복 차원에서 혹은 미군 폭격으로 희생된 사람까지 합치면 200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모두 추정치다. 피해자나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어림잡아 계산한 것일 뿐이다. 자국민에 대한 국가권력의 더러운 학살의 진상이 지금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학살을 명령하고 묵인했던 세력과 그 후예들이 계속 집권했던 탓이었다. 4·19 혁명 후 수립된 민주정부가 진상조사를 시도했지만, 5·16 쿠테타와 함께 등장한 군사정권은 즉각 이를 중단시켰다. 당시 군사정권은 아내가 학살당한 진상을 규명하려고 동분서주하던 이원식씨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등, 진상규명 노력을 친북 좌익활동으로 규정해 유족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엊그제 민간인 집단학살 매장지 유해 발굴에 착수하겠다며, 학살지 네 곳을 선정해 발표했다. 국가기관이 57년 만에 처음으로 진상규명에 착수하는 것이어서 뜻깊다. 그동안 경기 고양 금정굴, 경남 마산 여양리,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등 일부 매장지가 발굴되긴 했다. 그러나 그건 정부 조처를 기다리다 못해 유족과 마을 공동체가 명예회복을 위해 직접 한 일이었다. 진정성은 인정되지만, 공식성은 인정받기 어려웠다.

현재 진실화해위가 집단 학살 및 집단 매장지로 추정하는 곳은 150여 곳이다. 비교적 규모가 큰 사건만 선별한 것이다. 네 곳에 대한 유해 발굴은 진상규명의 첫걸음에 불과하다. 따라서 앞으로 갈 길은 멀고도 멀다. 진상규명을 극력 반대해 온 군사정권의 후예들이 정권을 잡을 경우 어떤 운명에 놓일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시민의 뜻과 의지다. 상처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마음을 닫게 한다. 현대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이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는 화해와 용서 그리고 통합은 불가능하다. 통합 없이 우리 사회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우리 시민이 앞장서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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