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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4.16 18:32 수정 : 2007.04.16 18:57

사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던 허세욱씨가 그제 숨졌다.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던 그는 보름 동안 사경을 넘나들다가 결국 자신을 버리고 한스런 삶을 마감했다.

우리는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 이래로 지금까지 목숨을 던져 저항한 수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다. 대부분은 이제 많은 사람의 기억속에서 지워졌지만, 그들의 가족과 동료들은 아직 그들을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 아픔을 세월이 지워낼 수는 없는 터다. 그럼에도 이제 목숨을 던지는 저항이 그저 옛일이길 바라는 게 뜻있는 이들의 소망이다. 살아남은 자의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희생으로 세상이 진정 바뀌었음을 확인하고픈 마음에서다. 이젠 죽음의 저항 대신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자부하고픈 심정에서다.

암울한 과거에 비하면 절차적 민주주의는 큰 진전을 이뤘다. 이제 그 누구도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못한다. ‘국민의 정부’를 넘어 ‘참여 정부’를 내세우는 시절이 아닌가. 그럼에도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참여 정부에서도, 철거민과 평택 대추리의 농민, 노동자의 이웃이었던 허세욱씨의 마지막 선택은 분신이었다. “과격한 투쟁은 옳지 않다”고 말하던 그의 분신은 힘없는 민중들이 참여할 자리는 아직 없다는 절망감을 담고 있다. 허씨의 죽음이 더없이 무겁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쯤 되면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겸허히 묻기는커녕 여론몰이에만 몰두하는 정부에 참여의 의미를 물어야 마땅하다. 장·차관이 참석한 워크숍 자리에서까지 ‘개방 안 하고 살 수 있느냐’고 윽박지르는 대통령에게 민주주의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모두들 냉정하리만치 차분하다. 허씨의 죽음을 그저 돌출적인 개인의 과격 행동쯤으로 치부하려는가.

정부는 이제라도 반성하고 태도를 바꿔야 한다. 자유무역협정의 벼랑 끝에서 절망해 ‘치명적인 유혹’을 느끼는 민중들이 계속 나타나야만 하겠는가. 그들의 소외감과 절망감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그래서 자유무역협정으로 진정 위기에 처한 것은, 대한민국의 경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다. 위기에 처한 이땅의 민주주의를 살려내야 분신의 비극은 끝난다. 허세욱씨의 명복을 빌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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