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20 17:53
수정 : 2007.04.20 19:07
사설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초안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와 에프티에이특별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보좌관 한 사람씩으로 제한해 컴퓨터 모니터로만 열람하도록 했다고 한다. 500쪽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문서를 화면으로만 보고 메모도 하지 말라는 요구다. 국회의원들의 반발로 메모를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태도다.
국회에 협정문 초안을 공개하는 이유는 형식적 통과의례로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국익에 부합하는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다. 모니터 화면 위에 나타난 영어 초안만 보고 이를 제대로 검토할 수는 없다. 모니터 열람은 가능하지만 문서 열람은 안 된다는 논리도 궁색해 보인다. 어떻게든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하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정부는 미국 쪽 일정에 맞춰 최종 협정문안 공개를 5월20일, 협정 비준 시한을 6월 말로 잡아놓고 있다. 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광범한 변화를 수반하는 자유무역협정을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제대로 검토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외교통상부가 밝힌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스무가지가 넘는 법률 개정이 필요하다. 수반되는 시행령과 시행규칙까지 포함하면 수십가지 법령을 개정해야 할 사안이다. 법률 하나를 고칠 때마다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가. 입법예고, 공청회를 통한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 의안 상정과 여야간 협의, 그리고 법사위 검토 등을 거쳐야 한다. 숱한 전문가 참여가 필요한 협정문안 검증을 한 달 남짓에 끝내라는 것은 사실상 검증을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협상 과정에서 비밀 유지는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 일정과 방법까지 정부가 판단하고 결정하려 한다면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다. 정부는 초안 열람의 조건으로 의원들의 각서를 요구하고 감시용 폐쇄회로 텔레비전을 설치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자유무역협정을 지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까지 반발하고 나왔겠는가.
정부는 최종 문안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개를 꺼리고 있지만 그렇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정부 스스로 초안 내용이 약간 바뀔 수 있지만 실질적인 내용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금은 사소한 문안 해석의 오해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충분한 검토 없는 졸속 검증을 경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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