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03 18:50
수정 : 2007.05.03 18:50
사설
정부가 유신독재 시절에나 어울릴 ‘국기에 대한 맹세’를 계속 고집하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얼마 전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이 맹세를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넣었다. 지난해 말 국회는 국기법을 제정하면서 이 맹세와 관련된 조항을 넣지 않되, 정부가 시행령에 넣을지 여부를 신중히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행자부는 별다른 논의 없이 시행령안을 만들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그동안 무조건 국기에 대한 맹세를 되뇌도록 강요받았다. 이 탓에 이 맹세가 얼마나 전체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지 잘 의식하지 못한다. 이런 무의식적인 수용 효과는, 1972년 이 맹세를 만든 박정희 정권이 노린 바일 것이다. 그래서 이 맹세를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일은 독재 잔재를 털어내는 중요한 작업이다.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 맹세가 가진 위험성은, 그에 앞서 68년 충남도 교육청이 처음 만들었던 맹세와 비교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그 내용은 이렇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하여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조국의 통일과 번영’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으로 바뀌고, ‘정의와 진실로써’가 ‘몸과 마음을 바쳐’로 바뀌면서 영 딴판이 됐다. 충남도의 맹세는 국가가 충성을 다하는 방식이 정의와 진실에 바탕할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충성의 대상이 되는 국가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는 걸 담고 있지만, 지금의 맹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라면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정의롭지 못한 국가에 대한 무조건 충성이 진정한 ‘애국’과 거리가 멀다는 건 상식이다. 맹세를 시행령안에 그대로 넣은 행자부는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만하다.
좀더 원칙적으로 보면 국가가 국민에게 특정한 맹세를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그러한 맹세의 강요를 통해 애국심을 고창한다는 것이 자칫 국가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충성 서약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새로이 국적을 취득하는 귀화자에게나 요구할 만한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성은 각자가 진심으로 우러나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할 때라야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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