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5.25 17:57
수정 : 2007.05.25 19:53
사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전문이 공개됐다. 예상했던 대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불리한 조항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정부가 성과를 거뒀다고 주장했던 무역구제위원회나 역외가공위원회 등은 기대에 크게 못미치는 수준이다. 반면 미국은 각종 상설 위원회 등을 통해 국내 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통로를 만들어놨다. 협정 체결 자체에 매달리다가 실리를 내주고 경제주권까지 내준 결과는 아닌지 의문이다.
공개된 협정문을 보면 정부가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한 대목들이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애초 목표에는 못 미치지만 실질적 진전을 이뤘다고 한 무역구제위원회 구성이 대표적이다. 위원회의 역할이 △기관 간 협력 △정보교환 △교육프로그램 개발 △반덤핑 및 상계 관세 조사에서 당사국의 관행논의 등 한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역외가공위원회 역시 마찬가지다. △한반도 비핵화 진전 △남북 관계에의 영향 △노동·환경 등에서 국제 규범 준수 등 까다로운 조건이 붙어 있어 개성공단 제품이 국내산으로 인정받기 어렵게 돼 있다. 명분을 살리기 위해 형식적으로 이름만 올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반면 미국 쪽의 요구를 반영한 대목은 매우 구체적이고 주권을 훼손하는 측면까지 있다. 섬유의 경우 미국의 개입 정도가 지나치다. 국내 섬유·의류업체의 명단과 연락처는 물론 임원 명단과 생산설비의 수와 종류, 원료 공급자의 신원 및 미국 안 고객의 명단과 연락처까지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불시에 국내 업체를 방문해 조사할 수도 있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국회를 무시하고 정부가 임의로 특소세율과 지방세율까지 정해놓았다. 농산물 분야에선 뼈 있는 쇠고기 수입과 유전자조작생물체(LMO) 수입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더불어 위생검역 분야 상설위원회를 설치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통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줬다. 협정문안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사실 의약품, 위생검역 등 분야에서는 국가 정책의 결정권을 절반 가량 미국 쪽에 내준 것이나 다름없는 모양이다.
한-미 협정 타결 내용이 우리가 챙긴 것보다는 내준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새삼 얘기할 것이 없다. 농업과 제약은 거의 무방비 상태로 개방돼 산업이 초토화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여기에다 미국이 정책 결정 과정에 일일이 개입하게 된다면 우리 정부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 쇠고기 협상과 유전자조작생물체 협상 등에서는 실제로 그런 모양새를 보였다. 실리를 대부분 내주고 경제주권이란 명분까지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물론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는 1400여 쪽에 이르는 협정문안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전제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협정문안 공개는 본격적인 검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 통상 전문가, 이해관계를 가지는 산업별·분야별 대표들의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국익과 실리에 대한 판단이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향후 새로운 정책 결정 과정에서, 또 무역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경제주권을 얼마나 확고하게 지켜갈 수 있느냐도 중요하게 감안해야 한다.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다. 협정이 체결되면 미국 쪽의 통상 압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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