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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10 18:02 수정 : 2007.06.10 19:59

사설

6월 항쟁 스무돌이다. 20세기의 기념비적 시민혁명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그 정신과 가치를 꽃피워야 할 나이다. 성년이니 내일의 희망과 비전을 이야기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희망은커녕 온통 위기담론뿐이다. 시민사회 위기, 공동체 위기, 민중적 삶의 위기, 운동의 위기에다 민주주의의 위기까지 나온다.

사실 6월 항쟁의 정신은 토론으로 밤낮을 지샐 만큼 복잡했던 것은 아니다. 진보와 보수, 좌·우, 중도 혹은 신분에 따라 달라질 것도 아니다. 6월의 광장을 메웠던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시장 상인과 중소기업인,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시민의 이름, 공동체의 이름으로 요구한 것은 하나였다. 정치·경제·사회적 민주화가 그것이다. 군사독재의 정치적 항복으로 일단락되는 그런 민주화가 아니라, 7·8·9월 노동자 대투쟁 속에서 좀더 선명해진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과 삶의 질이 보장될 때 완성되는 그런 민주화였다.

지난 20년 동안 정치·절차적 민주화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였다. 그동안 노동권은 신장됐고, 복지예산은 늘었으며, 사회 안전망도 제법 확충됐다. 그러나 소득·주택·교육·의료 등 모든 부문에서 양극화는 심화됐으며, 절대 빈곤층도 크게 늘었다. 공동체의 유대는 무너졌으며, 계층 사이 갈등은 커졌다. 그건 신자유주의의 경쟁과 효율에 대한 맹신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 원리로 자리잡은 탓이었다. 6월 항쟁이 밀어낸 군부독재의 빈자리를 자본과 시장이 차지해 버린 셈이다.

6월 항쟁의 땀과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물론 외환위기 탓이 크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분열·연대의 붕괴를 먼저 꼽는 게 온당하다. ‘양김’의 분열은 신군부의 적자에게 권력을 내줬고, 차별과 불평등에 근거한 구제도를 혁파할 기회는 무산됐다. 구제도는 온존했고, 사회·경제적 기득권은 유지됐다. 김영삼 대통령 역시 친자본 반노동 정책으로 불평등을 심화시켰지만, 분열된 민주세력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외환위기는 닥쳤고, 한국은 투기자본의 약탈장이 되었다.

외환위기와 함께 밀려든 신자유주의는 시민사회를 결정적으로 파편화했다. 잇따르는 대량해고 속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외면했고, 사무직은 현장 노동자와 갈등했다. 지식인은 공동체 문제를 외면했고, 대학은 취업을 위한 정글이 되었다. 시장만능 속에서 공공성은 무시됐고, 사회적 약자는 외면당했다. 민주정부를 자처한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뚜렷한 전망과 대안 부재 속에서 신자유주의 기조를 유지·강화했다. 연대가 깨진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 개혁적 정치인들은 이를 막아낼 힘도, 바로잡을 대안적 역량도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다시 불평등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경제 규모는 20년 전보다 여섯 배 넘게 커졌지만, 양극화는 심화됐고 사회적 신뢰는 깨졌다. “기술의 발전은 부와 교육, 건강 등 다양한 불평등을 해소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공교롭게도 세계 최고의 갑부 빌 게이츠였다. 6월 항쟁이 추구한 것도 불평등의 극복이었다. 그 깃발이 지금 흔들린다. 이제 다시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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