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05 18:48
수정 : 2007.09.05 18:48
사설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영어도시 조성을 선언하고 나섰다. 지난해 경남 밀양시가 1만여명이 거주하는 미국형 영어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이후, 부산과 인천에 이어 이번엔 서울의 서초구가 영어도시 혹은 선도도시를 선언했다. 밀양은 아예 영어도시의 이름을 ‘리틀 US’(가칭)로 지었다. 부산은 2020년까지 2700억원을, 인천은 2014년까지 2336억원을 들여 이른바 ‘영어가 자유로운 도시’를 만들겠다고 지난 7월 제각각 발표했다. 빗나간 영어 광풍을 이용해 한 건 하려는 지역 정치인들의 행태가 한심하기만 하다.
영어도시 조성 방법은 간단하다.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일상에선 영어가 필요 없음을 뜻한다. 사실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국제도시에서도 시민들 다수가 영어를 쓰지도 않고, 구사할 이유도 없다. 그런데 서초구는 시민 3명에 1명꼴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하겠다고 하고, 간부회의도 영어로 하겠다고 했다. 미국에 편입시키겠다는 생각이나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무모한 영어 광풍이 빚은 부작용은 한계를 넘어섰다. 천문학적인 사교육비의 40%는 영어 배우기에 쓰인다. 올해 서비스수지 적자는 230억달러로 추산되며, 적자 요인의 상당 부분은 국외 영어연수나 조기 유학이 차지한다. 영어도시 조성은 이런 현실을 더 악화시킨다. 영어가 전혀 필요 없는 일반 시민에게도 영어 학습을 강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모르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데 누가 이를 거부할까. 인천은 하루 먹고 살기도 빠듯한, 농·어촌 저소득층 주민이나 도시 임대주택 입주자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가운데 영어권 방문객은 31.7%에 불과하다. 프랑스나 중국 국민이 영어를 잘해서 영어권 관광객이 몰리는 건 아니다.
우리의 언어 사대주의는 뿌리가 깊다. 조선시대엔 한문, 일제 하에선 일본말이 숭배됐다. 지금의 미국 패권 아래선 영어(미국말)가 숭배된다. 그 속에서, 우리의 문화와 사유와 지식의 보고이자 생산수단인 우리말과 한글이 죽어간다. 영어도시 조성에 쓰겠다는 예산이면,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충분한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이르면, 분노가 치민다. 영어교육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공교육 마당에서 제대로 되도록 지원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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