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06 18:36
수정 : 2007.09.06 18:36
사설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항소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비자금 조성만으로도 법정 최저형이 징역 5년인 중범죄인데, 법원이 수백억원의 비자금 조성과 횡령·배임 등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도 집행유예를 내렸으니, ‘봐주기 판결’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법원이 기업인 범죄에 유독 관대하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면서, 대법원장의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 의지도 빈말이 돼 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국민의 냉소와 불신을 사법부가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된다.
항소심 법원은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현대차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판결의 주요 배경이었음을 밝혔다. 정 회장이 선두에서 지휘하는 독특한 경영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 그를 법정구속하면 현대차와 우리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을 걱정했다는 뜻의 말도 했다. 이런 설명은 현대차가 지금껏 해 온 ‘황제경영’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번 사건과 같이 기업을 개인재산처럼 여기고 회삿돈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또다시 눈감아주겠다는 말과 다를바 없다. 횡령, 배임,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 부당 내부거래 등의 기업범죄는 기업의 투명성을 해치고 시장에 대한 신뢰를 깬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범죄보다 반시장적이고 반기업적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또는 그런 일이 재발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기업 경쟁력이나 시장 기능은 훼손된다. 그런 행위에 대해 이렇게 손쉽게 면죄부를 준다면 기업범죄의 근절은 기대하기 어렵다. 시장경제 질서도 장기적으로 위태롭게 된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사회봉사 명령을 함께 내렸다. 1조원 규모의 사회공헌 약속에 따라 매년 1200억원씩의 재산 출연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집행유예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한 게 뼈대다. 여러모로 아쉬운 이번 판결에서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궁여지책으로 한 약속이더라도, 재벌들이 자기 재산에만 집착하지 않고 사회에 대한 공적 책임에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정 회장 쪽이 내놓을 돈의 재원도 부당이득이나 법인 재산을 끌어댄 것이어선 안 된다. 법원은 또 정 회장에게 준법경영을 주제로 강연과 기고를 할 것을 주문했다. 말뿐인 약속이 아니라 그동안의 경영행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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