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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9.21 17:48 수정 : 2007.09.21 18:11

사설

새 달력을 받으면 가장 먼저 찾아보는 게 추석과 설 연휴였다. 주말이나 공휴일이 섞였을 때의 낙심이나, 올해처럼 주말을 연휴의 덤으로 알뜰하게 즐길 수 있을 때의 기쁨은 누구나 비슷하게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명절이 다가오면, 명절 증후군과 관련한 호소로 각 매체의 지면은 시끄럽다. 덩달아 부모와 남편은 주눅들고, 주부의 신경증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차라리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기원이나 하지 말 일이지, 가정 평화를 생각하면 명절이 없어지는 게 좋겠다는 투로 타박해대는 세태가 참으로 가볍다.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의례적인 푸념들이 쏟아져나왔다. 엊그제 여성 포털사이트 아줌마닷컴(www.azoomma.com)이 발표한 조사 결과도 이런 푸념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거기엔 보석 같은 메시지가 하나 숨겨져 있었다. 즐거운 추석을 여는 열쇳말 같은 것이기도 했다. 주부들을 기쁘게 하는 건 거창한 보답이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수고했다’ 혹은 ‘어서 친정에 가야지’라는 말, 혹은 남편의 ‘고생했지, 어깨 주물러줄까’ 따위의 소박한 말 한마디였다. 행복의 열쇠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세상의 아내들은 공간적으로 시집에선 며느리이고, 친정에 가면 올케가 눈치보는 시누이다. 지금은 며느리지만 머잖아 며느리가 경원하는 시어미가 되고, 사위 눈치가 보이는 장모가 된다. 세상의 남편도 마찬가지다. 집에선 남편이지만, 부모에겐 아들이고, 처가에선 사위다. 서로 힘들게 하는 건 이런 다양한 관계망이 아니다. 어떤 관계 속에서건 지켜야 할 역지사지의 원칙이 사라진 탓이다. 설사 명절 노동을 동등하게 분담하지 못하더라도, 따듯한 위로의 말 한마디가 차별과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낸다고 하지 않던가.

위로의 말은 이해에서, 이해는 대화에서 비롯된다. 올해는 차례상 만큼이나 풍성한 이야기 상도 차려보자. 상차림의 가장 기본은 ‘수고하셨소’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면 딸과 사위가 오기 전에, 며느리와 아들을 먼저 처가에 보내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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