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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식을 묻는다 |
내년부터 쓰일 일본 중학교 역사·공민 교과서의 검정 결과를 보면, 일본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별로 개선점이 보이지 않는다. 검정 최종본을 분석한 국내 전문가들은, 역사 교과서에 대해 일부 개선된 부분이 있기는 하나 현행본보다 개악된 내용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특히 공민 교과서의 독도 관련 기술은 더욱 나빠졌다.
교과서 검정 결과는 난기류에 휩싸인 한-일 관계의 진로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만큼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우리는 일본을 이끄는 지도세력이 역사·철학적 인식 빈곤과 폐쇄적 아집에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공민 교과서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길러주고 이웃들과 편견 없이 더불어 살아가게 하는 인식을 심어주는 주요한 도구라는 점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가 일본의 교과서 개정 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주제넘은 내정간섭이 아니라 후세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평화와 번영의 기반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일부 교과서가 국수주의적 배타적 색채를 짙게 풍기는 쪽으로 개악되고 있는 배경에는 우경화 움직임이 도사리고 있다. 정계·재계·언론계·문화계 등에 포진한 극우·수구 세력이 이런 움직임의 주역이다. 이들은 이웃 나라들의 올바른 역사청산 요구에 대해, 일본을 정당한 이유 없이 괴롭히는 짓으로 매도해 왔다. 한국과 중국이 일본의 퇴행적 우경화 움직임을 비판하면, 자국 내의 취약한 정권기반을 다지려는 정치적 술수라고 몰아쳤다. 단세포적 세계관이 머리에 박힌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대일 비판을 ‘3류 정치’로 깎아내린 것은 그 전형적인 수법이다.
일본의 수구세력이 되풀이하는 단골 대사의 하나는 “수없이 반성과 사죄를 했는데 무엇을 또 하란 말이냐”는 것이다. 일왕이나 총리가 외교 행사에서 판에 박은 말투로 과거사에 대해 사죄 발언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발언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집권당의 고위간부나 내각의 책임 있는 일원이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난징학살과 군대위안부 동원 등의 반인류적 범죄가 ‘날조’라는 주장을 편다면, 반성과 사죄 운운하는 발언은 적어도 과거의 역사적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허한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우리는 일본이 패전 뒤 평화헌법의 토대 아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일본이 이제 자신의 경제력에 걸맞은 구실을 국제사회에서 하겠다고 나서는 데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일본이 진정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선량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철저히 반성하고 그 피해자들에게 진지한 속죄를 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나 양자간 국제협정으로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이 법적으로 완전히 끝났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아시아 해방전쟁’ 식의 망언을 수시로 내놓는다면 결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일본은 지금 미국의 후원 아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려고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엔의 표밭이라 할 아프리카나 중남미 나라들의 각종 모임에 정부 대표단을 파견하고 대폭적인 정부 개발원조의 증액을 공언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과 거의 역사적 인연이 없는 아프리카 수단에까지 자위대 파병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이런 노력이 정작 이웃 나라들의 믿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추진된다면 무슨 설득력이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역사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부 극우세력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의 화해와 협력을 향한 희망의 싹이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는 거의 4년 전 후소사 역사왜곡 교과서의 채택률을 1% 아래로 묶은 일본 시민단체들의 헌신적 노력에 여러 차례 박수를 보내고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이들은 당시의 투쟁 경험을 토대로 한국·중국의 시민단체와 연대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일본의 양식 있는 지성들이 제대로 가세해준다면 동북아의 화해와 협력 시대가 머지않은 장래에 열리리라는 것을 믿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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