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제 서명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은 남북 관계와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역사적 문서라고 할 만하다. 이 선언은 그동안 진전된 남북 관계의 바탕 위에서 군사·평화, 경제협력, 교류, 인도적 문제, 통일 등 여러 분야에서 앞으로의 진로뿐만 아니라 구체적 실천 방안까지 담고 있다. 두 정상이 짧은 시간에 이런 합의를 이룬 데는 상황 인식과 전망에서 많은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대 이상의 획기적 합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평화와 경협을 아우른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 추진이다. 북쪽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이 지대는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내용으로 포함한다. 다음달 평양에서 열릴 국방장관 회담은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는 데 필요한 군사 보장조처를 우선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다. 평화와 공동번영이 선순환 구조를 이루는 모델이 한반도 서쪽 한가운데에서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 지대 설치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푸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한반도와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이 만나 종전선언 문제를 추진하는 데 남북이 협력해 나가기로 한 것은 남북이 평화체제 논의를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런 시도는 “군사적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기로 한 합의와 맞물려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크게 진전시킬 것이다. 핵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공동노력 또한 분명하게 명시됐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져 온 경협 부문에선 기존 사업을 심화시키고 분야와 지역을 확장하는 구체적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그 가운데 개성~신의주 철도 및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이용을 위한 개·보수 추진과 안변·남포 조선협력단지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기간산업 협력은 남북 경협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 것으로 기대된다. 백두산 관광을 위한 서울~백두산 직항로 개설은 금강산 관광에 이은 새로운 관광사업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남북 화해·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선언에 따라 “남북 정상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한다면 남북 정상회담은 사실상 정례화하는 셈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명시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다음 회담은 당연히 서울에서 열려야 한다. 정상회담의 정례화는 다음달 서울에서 1차 회담을 열기로 한 남북 총리회담과 의회 등 각 분야의 대화, 부총리급으로 격상하기로 한 남북경제협력 공동위원회 등과 상승작용을 하면서 남북 관계 수준을 남북연합 초기단계로 진입시킬 것이다.이산가족 문제는 금강산면회소 완성 이후 양쪽 대표를 상주시키고 상시 상봉을 진행시키기로 하는 데 그쳤다.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이번 선언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남북은 앞으로 있을 고위급 회담 등에서 전향적 접근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남북 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한 것은 국가보안법과 북한 노동당 규약 개정 문제 등을 상호주의 정신에 따라 다루자는 것으로, 지금 시점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남북이 내부 문제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 또한 이제까지 때때로 있었던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타협책이다. 한반도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의 섬’이다. 또 주변 강대국들은 자신의 뜻대로 질서 재편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현상유지를 바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이 평화와 번영을 이루려면 기존의 사고와 관행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남쪽의 국내총생산(GDP)이 북쪽의 수십배에 이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남북 체제 경쟁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회담에 나온 북쪽 대표들은 남쪽의 과감한 투자를 바라면서도 내부 여건 정비에는 소극적인 모순되는 태도를 보였다. 마음은 있으면서도 개혁·개방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언은 북쪽의 이런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성실한 실천이 중요하다 남북 정상회담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고 해서 앞으로 남북 관계가 순조로울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성실한 실천이다. 이번 선언 내용의 대부분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시행하는 데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정부는 남은 임기 동안 최선을 다해 이행의 토대를 쌓아야 하고, 정치권도 당리당략을 떠나 대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남북 두루 통일의 전망을 갖고 협력한다면 평화와 번영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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