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0.17 18:06
수정 : 2007.10.17 18:06
사설
한-미 자유무역협정 미국 수석대표를 맡았던 웬디 커틀러가 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미국 의회의 승인을 얻으려면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어제 “우리 국회가 미국에 앞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의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의 말은 커틀러의 발언에 화답하는 격인데,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미국이 원칙에 어긋난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음에도, 우리 쪽은 협정만 발효된다면 미국 요구를 다 들어주겠다고 고개숙인 꼴이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에 대한 국회 심의가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여야 의원들이 협정의 득실을 면밀히 따지고, 협정 발효에 따른 대책을 충분히 살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국회가 비준동의안 처리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나라 장래를 위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정부가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폭을 무리하게 늘릴지 모른다는 걱정은 날로 커지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자유무역협정과 미국산 쇠고기 개방은 별개라는 태도를 고수해 왔으나, 실제 움직임은 딴판이었다. 미국 쇠고기 수출업자들이 위생조건을 쉼없이 어겼어도 관대한 조처를 취했다. 개방 폭을 조정하는 미국과의 협상도 여러 절차를 건너뛰었다. 지난 11~12일 열린 한-미 쇠고기 검역 전문가 회의에서 미국은 소의 나이나 부위 제한을 없애고, 모든 쇠고기를 수입하라고 우리 쪽에 요구했다. 물론 우리 쪽은 모든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과 내장·꼬리 등의 부산물은 수입할 수 없다며 맞섰지만, 개방 확대는 기정사실이 돼 버렸다.
미국 의회의 비준을 받으려면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하라는 커틀러 수석대표의 요구는 너무나 당당했다. 자유무역협정에 목을 매는 우리 정부의 약점을 잘 아는 까닭이다. 정부가 통상 협상의 원칙을 저버리고, 무리한 쇠고기 시장 개방 요구를 들어주면 미국은 또다른 양보를 요구할 것이다. 협정에 목을 매 이것저것 내주기만 한 뒤, 미국 의회가 협정을 비준하지 않아 우리만 바보가 되는 사태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다. 정부는 참여정부 임기 안에 협정을 마무리짓겠다는 오만하고 무모한 자세를 버려야 한다. 그것이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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