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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19 18:14 수정 : 2007.10.19 18:14

사설

복원된 건천궁은 아름다웠다. ‘21세기에 가장 잘 지어진 한옥이 될 것’이라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자랑이 오히려 새삼스러웠다. 연건평 296평 복원에 100억원이 들었다 하나, 우리가 되찾은 문화적 품격과 자부심에는 견줄 게 아니었다. 개문식이 있던 엊그제, 마침 장안당 날듯한 추녀에 얹힌 가을하늘은 아득히 높고 맑았다. ‘하늘은 푸르고’(건청궁) ‘땅은 안녕하여’(곤녕합), ‘길이 평안하기’(장안당)를 바랐던 기울어가던 조선 왕조의 비원이 새삼 눈물겨웠다.

그러나 장안당의 높은 품격, 곤녕합의 그윽한 향내에 취할수록 아쉬움은 더 커졌다. 전각은 복원됐으나, 비극의 역사적 진실은 여전히 규명되지 못한 까닭이었다. 건천궁은 조선 왕실의 회생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고 500년 왕조의 몰락과 함께 유린되고 철거된 상징적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루어진 왕조의 마지막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일제가 거기서 저지른 극악한 만행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고종은 건청궁을 흥선대원군의 영향에서 벗어나 내정 개혁과, 자주적 개방을 추진하기 위한 상징으로 삼았다. 고종은 거기에 한국 최초의 발전시설과 전등을 세웠고, 양식 건물인 관문각을 지었다.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하려던 일제에게는 불편한 공간이었다. 특히 그곳에서 청나라 혹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제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려던 명성황후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결국 일제는 1895년 8월20일(음력) 새벽 건청궁을 침탈해, 명성황후를 난자하고 그 주검을 건청궁 뒤 녹산에서 불태웠으며, 고종에게 그를 서인으로 강등하게 했다.

민족사적 치욕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확정된 진상은 없다. 시해된 곳이 옥호루인지, 곤녕합 마당인지도 엇갈리며, 시해 뒤 당했다는 능욕에 대해서도 이론이 분분하다. 일제는 주모자 48명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했으며, 현장 증거를 폐기했다.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 일파와 명성황후 일파의 권력투쟁 속에서 빚어진 사건으로 내몰았다. 병탄 1년 전인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해 아예 만행의 흔적마저 지우려 했다.

건청궁은 잘 복원된 한옥에 그쳐선 안 된다. 왕조의 비원과 이를 난자한 세기적 만행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저 한 조각 호사일 뿐이다. 진실의 복원에 매진하길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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