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왜곡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가 더욱 뻣뻣해지고 있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아시아협력대화를 이용해 벌인 한-일 외무장관 회담은 별다른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독도 문제가 두 나라의 핵심현안으로 등장한 상황에서 일본이 종래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한-일 관계는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정상 간의 상호방문이 몇 해 전부터 끊긴 중-일 관계만큼 악화할 것으로 우려된다.
말로는 ‘국제공헌’의 확대를 외치면서도 국수적 세계관을 고집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면 평화헌법과 함께 꽃핀 전후 민주주의가 급속히 화석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짧은 공백을 제외하고 줄곧 일본을 통치해온 보수파 본류는 몇 해 전만 해도 ‘경무장 친미노선’에서 크게 일탈하려 하지 않았다. 자민당 수구진영 일각에서 야스쿠니신사 공식 참배, 자위대의 국군화, 집단적 자위권 인정 등을 주장하더라도 그것이 보수 주류의 인식으로 자리잡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우선 망언을 하고도 거두어들이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각료가 침략전쟁이나 식민지 통치를 긍정하는 듯한 망언을 하면 일단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파문을 수습하려 했으나. 이제는 외국의 부당한 간섭에 밀려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나간다.
나아가 망언의 주체가 ‘천황’을 위한 헌신, 애국심의 발현 등 일제시대의 향수에 젖은 일부 극우적 정치인이 아니라 내각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자신이 침략전쟁의 에이급 전범이 함께 봉안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부전결의를 다짐하기 위한 행위’라고 강변하고 있으니, 그가 뽑은 각료들의 망언만 탓할 것이 있겠는가.
이제 길은 하나뿐이다. 부끄러움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는 나라라면 국제사회에서 철저히 망신을 주어서라도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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