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1.04 19:15
수정 : 2008.01.04 19:15
사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부처별 업무보고가 입길에 오르고 있다. 인수위가 ‘대통령 당선인의 주요 공약에 대한 실천 계획과 연도별 시간표’를 보고할 것을 요구하면서, 각 부처가 그동안의 정책 기조를 스스로 뒤집는 일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선 강압에 가까운 요구도 많은 것 같다. 대입 관련 업무를 대학협의체에 넘기겠다는 교육부의 보고만 해도 애초 교육부의 뜻이 아니라, 보고 직전 인수위의 보강 지시를 받고 뒤늦게 포함된 것이라고 한다. 대운하 계획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 바 있는 건설교통부는 사전에 인수위로부터 ‘계획의 타당성 여부는 놓아두고 사업 착수를 전제로 실무적·기술적 문제만 보고하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거칠게 말해, 입 다물고 시키는 일만 하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에 대대적인 정부조직 개편까지 예고돼 있으니, 존폐를 걱정해야 할 몇몇 부처는 물론 기능 확대를 기대하는 부처들도 인수위나 당선인의 입맛에 맞는 보고를 할 수밖에 없을 게다. 이렇게 되면 인수위는 자신들이 듣고 싶은 얘기만 듣게 된다. 곧 점령군의 모습이다. 그 서슬 앞에서 그동안의 정책과 전혀 다른 보고를 해야 하는 공무원들이 자신을 기만해야 하는 처지에 적잖은 모멸감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죽하면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인수위에 ‘인격적 예우’를 당부했겠는가.
물론 정권이 바뀐다고 하루아침에 소신을 바꿔 ‘코드 맟추기’에 바쁜 몇몇 부처나 일부 전·현직 고위공무원들의 행태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는 직업공무원의 전문성과 중립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공무원이 무슨 힘이 있나’는 한탄도 변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선후를 따지자면, 인수위 쪽 잘못이 더 크다고 봐야 한다. 말 그대로 ‘국민의 봉사자’여야 할 직업공무원들을 자신들의 필요에 맞춰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시키려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수위가 할 일은 따로 있다. 인수위법은 인수위의 업무를 현황 파악과 새 정부의 정책기조 및 출범을 준비하는 일로 정해두고 있다. 지난 두 차례의 인수위는 여기에 더해 공약에 대한 의견 청취에 주력했다. 공무원들에게 공약을 들이대 실행계획을 짜라고 닥달하지는 않았다. 이번 인수위도 열린 마음으로 보고를 받고, 공약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정책틀을 짜는 게 먼저다. 인수위로선 입이 아니라, 듣는 귀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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