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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11 19:11 수정 : 2008.01.11 19:11

사설

“우리는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에요” <외국인 이주노동자 인권백서>에 담긴 한 이주노동자의 외침이다. 인종적 편견 등 다중의 고통에 처해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를 이토록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외침이 있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근로기준법 책자를 들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절규가 그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인권유린과 차별은 본질적으로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차별은 죽음으로도 풀리거나 끝나지 않는다. 죽음, 그것도 여럿이 함께 죽어서야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는 그들은 어쩌면 이땅에서는 죽어서도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들은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신원 확인이 안 돼서, 유족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서다. 결국 지방자치단체나 인권단체의 손으로 화장돼 ‘처리’된다. 문제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게 아닌데도 이렇게 처리되는 사례가 적잖다는 점이다. 이주노동자 사망사고가 나면 민간단체들이 주로 나서서 유족과 접촉을 시도해 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망자의 지인을 통해 수소문하는 식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다, 본국의 행정사정이 나쁘기라도 하면 유족을 아예 찾지 못하기도 한다.

유족과 연락이 닿아도 사정이 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자 등 복잡한 행정절차로 뒤늦게야 유족들이 들어오거나, 또 주검을 냉동처리해 본국으로 송환하는 과정에 드는 비용 때문에, 이국에서 한줌의 뼛가루가 되는 경우가 많다. 비용 등의 문제로 유족들이 국내에 아예 들어오지 못하면 역시 화장터에서 ‘처리’될 뿐이다. 숱한 이주노동자 사망사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을 방치하고선 대한민국은 다문화 사회, 인권 사회라 할 수 없다. 인권단체들은 각종 이주노동자 사망사고를 처리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체계적 지원만 있다면 적어도 이런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민간단체가 신원 확인이나 유족들을 찾는데 두세 달 걸린다면, 현지 영사관이 나서거나, 행정기관끼리 접촉하면 며칠 안에 해결할 수 있다. 넋이라도 고향 땅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은 이 나라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 온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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