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1.24 20:02
수정 : 2008.01.24 20:02
사설
2013년부터 수능시험 영어를 대체하는 영어능력시험을 등급제로 보게 한다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발표를 두고 반응이 다양하다. 학부모들은 읽고·쓰기에 이어 듣기·말하기까지 사교육을 받게 됐다며 한숨 쉬고, 사설학원들은 새로운 시장 출현에 반색하고 있다고 한다. 영어 사교육을 줄이고, 영어 구사력을 높이려는 조처라는데 현장의 반응은 정반대인 셈이다. 왜 그럴까?
영어능력 시험제의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정동영 열린우리당 후보도 비슷한 공약을 내놓았다. 대학입시에서 영어과목을 폐지하고, 국가가 공인하는 영어인증제를 도입한다는 게 뼈대였다. 능력시험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증제든 능력시험제든 그 목표는 영어 사교육비를 줄이고, 사교육으로 좌우되는 영어 교육 격차를 줄이자는 데 있다. 연간 30조원에 이른다는 사교육비의 절반 정도가 영어 사교육에 투입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영어 실력에 따라 특목고 및 상위권 대학 진학은 물론 취업까지 좌우되는 현실이니 영어 사교육이나 외국연수 등을 나무랄 수도 없다. 따라서 정치권의 사교육비 및 영어 격차 축소를 위한 노력은 당연하다.
문제는 현실적인 여건이다. 정책 목표가 훌륭하더라도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등급제 능력시험이라 해도, 등급이 입시에서 중요한 전형요소가 된다면 학생들은 높은 등급을 얻고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여기에 대학이나 특목고가 영어 논술 혹은 면접까지 도입하면 사교육 시장만 팽창시킬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중·고교가 읽기 쓰기 외에 듣기와 말하기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사실이다. 매년 3000여명의 유능한 영어 교사를 양성하겠다고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가 하지 못하면, 그만큼 사교육 시장은 넒어진다. 보완 차원에서 영어 몰입교육을 확대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게(교과목 수업)도 구럭(영어 구사력)도 모두 놓치는 일이다.
서둘러선 안 된다. 먼저 대학 등의 협조와 유능한 교사 확보 등 여건 확충에 노력해야 한다. 비영어권에서 영어 구사력이 최고수준에 속하는 핀란드엔, 영어 인증제도 능력시험도 없다. 몰입교육도 영어과목에 한해 시행할 뿐이다. 다만 우수 교사를 확보하고, 영어방송을 많이 활용하도록 노력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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