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인 사건의 충격이 생생한데 또 가슴 철렁할 일이 벌어졌다. 경기도 일산의 아파트 단지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이 흉기를 든 괴한에게 마구 맞아 납치당하기 직전에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조됐다.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경찰의 대응이다.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증거까지 있는 납치 사건인데도 신고를 받은 경찰은 단순 폭행사건으로 처리했다. 초동수사는커녕 사흘이 지나서야 본격수사에 나서고 언론에 알리지 말라며 사건 축소에 급급했으니, 추가 범행을 조장한 셈이 된다. 사건이 벌어진 날은 공교롭게 어청수 경찰청장이 ‘어린이 납치·성폭행 종합 치안대책’을 발표한 날이다. 말만 번드레한 경찰의 실상을 보는 듯하다. 일선 경찰만 탓할 일도 아니다. 뒤늦게 부산을 떤 이번 사건과 달리, 비슷한 때 열린 등록금 인상 반대집회에는 미리부터 경찰의 온갖 간섭이 있었고, 당일엔 집회 참가자의 갑절 가까운 경찰력이 동원됐다. 지휘부의 관심이 온통 시국치안에 쏠렸으니, 민생치안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따지자면 경찰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이가 ‘법질서’를 강조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런 그가 이제 와 경찰을 꾸짖고 있으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사실, ‘법질서’의 핵심은 시위·파업을 때려잡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밤거리를 마음 놓고 다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경찰의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 시국치안 부서보다는 수사와 민생 분야에 인사와 처우 혜택을 주고 격려하는 게 당장 할 일이다. 이번 사건의 책임자를 엄히 문책하는 등 상벌을 분명히 하고, 축소·왜곡이 없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경찰이 본분인 민생치안에 열중하도록, 괜한 일에 이들을 동원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부터 그리 해야 한다. [한겨레 관련기사]▶ 아이들 생명 위협받는데 ‘시국치안’ 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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