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22 21:40
수정 : 2008.04.22 21:40
사설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퇴진을 포함한 경영 쇄신안을 발표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 총수가 물러나겠다며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보는 심경은 착잡하다. 18만 삼성 임직원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이 회장의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는 일반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평가할 만하다. 삼성의 ‘황제경영’ 당사자와 이를 지탱해온 전략기획실의 퇴장은 삼성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조처들이 각 계열사의 자율경영체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해 삼성이 명실상부한 세계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삼성의 쇄신안을 긍정적으로만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그동안 제기된 비리 혐의의 실체나 진실을 인정하는 내용이 없고, 문제의 근원인 황제경영체제를 개선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과거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서는 핵심 당사자들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허물을 덮고, 미래의 경영시스템에 대해서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이재용 체제로의 계승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특검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이번 쇄신안은 특검 수사가 제대로 됐을 때 의미가 있다. 특검 수사는 문제된 불법 행위 가운데 빙산의 일각에도 못미치는 부분을 들춰내는 데 그쳤다는 게 중론이다. 삼성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수뇌부가 경영권 승계를 위해 편법과 불법을 일삼았으며, 수조원대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고, 정·관계에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로비를 했다고 폭로했다. 특검은 김 변호사가 손에 쥐어주다시피 한 비리 의혹을 눈감거나 타협하고, 불법 비자금으로 의심되는 차명계좌까지 상속 재산으로 인정하는 등 면죄부를 주었다. 이 회장이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했지만 진정한 사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검에서 불법으로 확인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에 대해 언급조차 않은 점은 아쉽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달라진게 없으며, 재산상의 손실 없이 승계구도를 확실하게 한 쇄신이란 비판도 이점에 기인한다.
현실적으로 쇄신의 주체가 곧 대상이고, 경영 공백이 우려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성의 고충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과 그룹 전략기획실, 계열사 사장단의 이른바 ‘3각 편대 경영’을 해왔다. 절대적 카리스마를 가진 이 회장의 퇴진은 경영 공백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지만 경영시스템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경영권 승계 집착은 정당성 없어
계열사별 독자 경영을 확대하겠다는 방침은 환영할 일이다. 삼성은 지주회사 전환은 어렵다면서 순환출자 문제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해 새로운 비전을 내놓지 않았다. 그룹 경영권이 위협 받아서는 안된다고 한 것으로 봐서, 시간이 지난 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경영권을 이어받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는 듯하다. 경영권 승계가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아도, 앞서 지적한 특검의 부당함 때문에 도덕적 정당성을 갖기는 어렵다. 문제의 근원은 합리성을 결여한 황제경영에 있다. 그 폐단을 극복하고 경영 효율성과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삼성도 이날 쇄신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밝힌 만큼, 세계일류기업답게 창의적이고 합리적인 미래 경영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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