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05 20:06
수정 : 2008.05.05 20:06
사설
원로 작가 박경리씨가 어제 오후 숨을 거두었다. 그의 82년 생애는 고스란히 한국 현대사의 발자취다. 문학적 성취가 그러했고, 생명사상으로 일궈낸 사색과 고뇌의 결과가 또한 그러하다. 이제 큰 사람 하나가 떠났으니, 그 빈자리 메울 길이 막막하다.
박경리 문학은 <토지>로 응축돼, 여기서 큰 산맥을 이루었다. 1897년 하동 평사리의 명절날 놀이 소리에서 시작해 1945년 광복의 만세 소리로 끝나는 이 웅대한 서사는 우리 현대사를 정면으로 응시한 시도였다. 토지의 상실과 회복을 축으로 하여 저마다 꿈틀거리며 오욕칠정으로 살아 숨쉬는 숱한 인간들의 드라마이면서, 동시에 동학혁명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적 변모의 역사를 담은, 말 그대로 대하(大河)였다. 이를 이어 우리 역사와 민중의 생생한 삶과 애환을 총체적으로 생생하게 담아내는 대하소설들이 이어졌다. 인간과 역사가 따로일 수 없는 그의 소설은, 인간으로서 그가 겪은 슬픔과 괴로움이 바탕이 됐으리라. 이를 승화해낸 데서 그의 문학은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
<토지>는 그의 생명사상의 시발이기도 했다. 토지의 사람들은 이 땅의 산천과 다르지 않았다. 26년 동안 <토지>를 쓰면서 박경리는 사유의 폭을 인간과 환경, 생명으로 넓혀 나갔다. 그에게는 자연의 파괴와 황폐가 우리 모든 생명체의 파괴요 황폐였으며,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자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전의 박경리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이런 생명관을 피력하고,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그가 청계천 복원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제기한 것도 그런 것이다. 2002년 1월 박경리는 아스팔트 속에 갇혀 있던 청계천을 되살리자는 꿈같은 이야기를 <한겨레>를 통해 처음으로 말했다. 그 뒤 청계고가도로가 철거되고 복개한 콘크리트를 걷어내기 시작했지만,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공사는 그가 꿈꿨던 ‘복원’이 아니었다. 청계천을 ‘놀이터’가 아닌 ‘쉼터’로, ‘조경’이 아닌 ‘문화와 생태’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문제 제기를 한 것도 박경리였다.
인간을 무시한 성장, 자연 파괴를 예사로이 여기는 개발의 광풍이 다시 불어오는 이즈음,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그의 빈자리에 서서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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