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05 20:11
수정 : 2008.05.05 20:11
사설
최근에 열린 미국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경찰에서 불법으로 규정했다. 경찰이 정한 기준대로라면 오늘과 오는 9일 예정된 촛불집회 등도 ‘불법 정치집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와 관련해 한진희 경찰청장은 어제 “촛불문화제 주최 쪽이 정치적 구호나 발언을 하거나, 참가자들이 이에 동조해서 구호를 외치거나 플래카드를 펼치거나 피켓을 흔들거나 하면 불법 정치집회”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정치적 구호가 없는 것(문화행사)은 괜찮지만 그런 게 있는 것(집회)은 안 된다는 것이다. 기준이 너무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도대체 문화행사와 집회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문화행사에서 정치적 요구나 구호가 나온다고 한들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행사를 순수하게 문화적으로 치르든 정치적으로 치르든 혹은 사회적인 의미를 담아내든 그것은 행사의 주체인 국민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 경찰이나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일이 아니다.
경찰이 들고 있는 단속의 근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야간에는 집회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 조항이다. 하지만, 이 역시 어불성설이다. 야간 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은 그동안 시민들의 의식이 성숙하고, 민주화가 진행돼 온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대표적인 악법의 하나로 지적돼 왔다.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낡은 법 조항을 우회하기 위해 그동안 촛불문화제라는 변형된 이름으로 많은 야간집회가 ‘합법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점은 경찰도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뒤늦게 이 조항을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에 적용하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조처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잘못된 집시법을 고쳐야 할 때이지 비현실적이고 위헌 소지가 있는 집시법 조항을 다시 끄집어낼 때가 아니다.
더구나 촛불집회는 가장 성숙한 집회의 형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며칠 전에 있었던 촛불집회도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음에도 물리적인 충돌 없이 끝까지 평화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촛불집회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들의 정당하고 자발적인 의사 표현의 하나다. 정치적인 이유로 봉쇄하거나 금지할 수 없다. 국민의 입을 강제로 막을 경우 더 큰 반발과 저항만 불러 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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