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5.14 20:12
수정 : 2008.05.14 22:32
사설-창간 20돌에 부쳐
세계 언론사상 최초의 국민주 신문으로 탄생한 <한겨레>가 15일로 창간 스무 돌을 맞았다. 멀고도 험난했던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젖는다. 독재권력의 잔재가 위세를 떨치던 창간 초기 한겨레는 생존 여부가 불확실할 정도로 눈에 보이지 않은 박해에 시달렸다. 북한 취재 계획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리영희 논설고문이 구속되거나 편집국이 압수수색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우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권력이 강요했던 보도의 금기와 성역을 타파했다. 남북 분단의 항구화에 악용돼 온 냉전 이데올로기도 걷어냈다. 은폐돼 왔던 권력의 치부와 인권유린 실태를 낱낱이 드러냄으로써 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한겨레는 또 제도언론이 외면했던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였다. 재벌의 부동산 투기와 정경유착 의혹을 파헤침으로써 재벌 개혁을 유도했다. 이렇듯 한겨레의 지난 20년 역사는 한국 민주화 진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회 전부문의 민주화 실현에 촉매제 구실을 했다. 한겨레가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신문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이런 기여도 때문일 것이다.
한겨레 창간 이후 2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권위주의 체제는 종식됐으며,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렸다. 이와 함께 대중의 관심사는 교육과 주거·환경·생명·의료복지 등 삶의 질 문제로 이동했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민주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편승하거나 방관함으로써 양극화의 심화를 불렀다. 그 결과 진보적 이념과 가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거부감은 깊어졌다.
이제 우리는 사회·경제적 격차를 줄이고 참여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일에 민주적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신뢰와 연대의 원칙에 입각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와 사회 양극화 등 한국사회가 직면한 크고 작은 위기의 타개 방안을 찾고자 한다. 물론 이는 결코 쉽지 않다. 과거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함께 정확한 현실 분석과 장기적 전망이 요구된다. 대중의 삶과 직결된 문제를 대중의 눈높이에서 모색하는 유연한 자세도 필요하다.
우리는 평화와 인권 문제에서도 한반도의 울타리를 넘어서 동북아, 그리고 세계로 외연을 넓혀 나아가야 한다.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은 동북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세력과 국제적 연대를 통해 앞당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북한 인권문제도 북한체제의 붕괴를 겨냥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 권리 차원에서 지혜롭고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미 100만이 넘은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와 점차 확산되는 다문화 가정의 문제도 더 외면하거나 미룰 수 없다.
눈길을 나라 밖으로 돌려보자. 냉전체제 종식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미국의 퇴조와 중국의 부상에 따라 다극체제로 재편되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외교정책은 한-미 동맹 강화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대외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미 관계 개선과 중-일 화해 등 향후 동북아 질서의 역동적 재편 과정에서도 한국은 주변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에 근본적인 전환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향후 한국의 외교는 고립무원의 상황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권력의 감시자이자 비판자로서 정치적, 경제적 지배 세력의 잘못에 대해 분명하게 시시비비를 가려 나갈 것이다. 우리는 또 새로운 시대정신을 포착하고 창간 이후 추구해 온 남북의 화해협력과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앞장서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열린 자세로 토론의 장을 마련할 것이며, 우리와 다른 견해와 주장에 대해서도 귀기울여 나갈 것이다. 창간 20돌을 맞은 오늘, 우리는 민족·민주·민권을 추구했던 창간 정신이 여전히 유효함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시대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유연한 자세로 따뜻한 공동체 삶을 실현하기 위해 진보언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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