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6·10 항쟁’ 21돌이다. 20여 년 전인 1987년 6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던 그 뜨거운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당시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시위는 넥타이 부대가 합류하면서 온나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치열한 국민 항쟁 끝에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하는 ‘6·29 항복선언’을 이끌어냈다. 대통령 직선제 쟁취는 당시로서는 소중한 결실이었다. 국가 지도자를 내 손으로 직접 뽑는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초보적인 권리를 따낸 것이다. ‘6·10 항쟁’이 우리 현대사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다시 ‘항쟁의 6·10’을 맞는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부터 시작된 촛불집회가 한 달 넘게 계속되는 등 정국은 87년 6월 이후 최대 위기 상황이다. ‘6·10 항쟁’과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닮은 점도 있지만 그 양상과 내용 면에서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이번 촛불집회를 계기로 한 단계 진화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외연을 넓히고, 그 깊이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주인임을 확인한 촛불집회 이번 촛불집회는 시작부터 달랐다. 여중고생들이 ‘안전한 쇠고기를 먹게 해 달라’는 자신들의 소박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5월2일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촛불은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순식간에 거세게 타올랐다.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젊은 엄마, 말끔한 정장차림의 직장인들, 취업 경쟁에 시달리던 대학생들이 합세했다. 시위 양상도 20년 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의 잔치마당이었다. 선두에선 경찰과 밀고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지지만 그 뒤에선 노래하고 춤추며 집회를 즐겼다. 지난주말 벌어진 ‘2박3일 국민엠티’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처음에는 ‘고시 철회, 협상 무효’를 외쳤지만 곧바로 ‘미친 소, 너나 먹어’, ‘이명박 아웃’ 같은 구호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자신의 권리와 주장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당당하게 외치는 그들은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였다. 그들이 한 달 넘게 길거리에서 정권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하나. 자신들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6·10 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쟁취했지만 그것은 갈수록 껍데기가 돼 가고 있다. 지금까진 직접·비밀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대통령을 선출한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이제 그런 형식적인 절차를 넘어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선거가 끝났다고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독주하는 것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시위현장에서 가장 즐겨 불린 노래가 <헌법 제1조>였다는 사실을 이 정권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시민이 나라에 바라는 요구도 달라졌다. 촛불집회가 먹을거리인 쇠고기에서 발단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이제 정부는 국민의 삶의 질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면 그 존재 의의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이번 촛불집회가 명확히 보여줬다. 단순히 먹고 마시고 거주하는 기초적인 생활조건의 충족을 넘어, 인간다운 삶의 질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정부는 더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제 국민은 생활 속의 민주주의가 보장되기를 요구하고, 천박한 물질 지상주의보다는 경제적 형평과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국민이 직접 길거리에 나서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상황은 정녕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다. 기성 정치권은 ‘길거리 정치’가 보내는 경고를 심각히 받아들여야 한다. ‘길거리 정치’가 ‘여의도 정치’를 대신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정치권이 시대에 뒤처진 모습을 보이는 한 ‘길거리 정치’라는 직접 민주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계기 돼야 한 달 넘게 지속하는 촛불집회의 양상과 내용 등을 보면 가히 ‘촛불 혁명’이라고 불릴 만하다. 다양한 계층의 국민 수십만이 모여도 평화적인 시위문화가 유지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보장하라는 등의 생활 밀착형 주장들이 주를 이루며,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이렇게 당당히 외치고 있는 이번 촛불집회가 민주주의의 질적 확대를 이루려는 ‘가치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 전국에서 100만 국민이 참여해 촛불을 밝힐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이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거기에 따르라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외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국민의 뜻에 따르는 것을 정치적 패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힘을 동원해 국민을 이기려고 해서는 더욱 안 된다.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길 다시한번 간곡히 당부한다. 그래서 ‘6·10 항쟁’ 21돌인 오늘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킨 ‘촛불 혁명’이 이뤄진 날로 기록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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