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10 18:49
수정 : 2008.06.10 18:49
사설
교육과학기술부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펴내는 출판사의 편집자를 불러 회의를 열기로 했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다. 사회 교과엔 지리 등 다른 과목도 있는데 유독 역사교과서 편집자만 부른 걸 보면 회의 성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교과부는 그동안 상공회의소가 낸 수정의견을 반영하도록 집요하게 압박해 왔다. ‘기업 프렌들리’도 좋지만, 일개 이익단체의 하수인이 되어 학문적 사실까지 재단하려는 모습은 역겹다 못해 보기 딱하다.
지난 3월 상공회의소의 수정 의견이 나온 뒤 교과부는 각 출판사에, 이것을 얼마나 반영할 것인지 통계로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5월엔 역사교과서가 좌향좌 돼 있다는 괴담 수준의 발언이 김도연 장관으로부터 나왔고, 교과부는 아예 정권의 입맛대로 교과서를 수정하기 쉽도록 교과용 도서 수정·보완체제 개선 방안을 수립하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은 물론 사회과학적 이론과 지식까지 기업과 정치권력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와 만용이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상공회의소의 의견이란 것이 창피할 정도로 엉터리가 많고 작위적이며 특정 이념에 몰입돼 있다. 예컨대 일제의 식민지배를 미화하고, 친일매판 행위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이승만 박정희를 찬양하고 있다. 수정 의견의 원전에 해당하는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대안교과서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틀린 곳만도 40여 군데나 된다고 한다.
물론 이익단체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교과서 수정 의견은 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검증과 채택 여부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학계가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정부는 수정 의견을 역사학회 등 관련학계에 검증을 의뢰하는 절차도 밟지 않았다. 다짜고짜 출판사에 반영 여부를 회신하라고 했다. 도대체 학문이나 학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상식도 없다.
교과부 관리들이 아무리 영혼이 없는 집단이라고 하지만, 앞장서 이런 몰상식적인 발상을 밀어붙였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학계가 청와대와 이주호 교육과학문화수석을 사령탑으로 지목하는 까닭이다. 마침 엊그제 보수적 교원단체인 교총까지 성명을 내어, 교육정책의 혼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 수석의 경질을 요구했다. 교과서를 이념세례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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