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7.01 20:50
수정 : 2008.07.01 20:50
사설
경찰청이 전국 일선 경찰서 정보과에 내려보냈다는 문건을 보면, 시곗바늘이 꼭 20년 전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 경찰은 권력의 주구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정보과는 민심을 염탐했고, 대공과는 학생들을 잡아들였고, 경비과는 시위를 진압했다. 이런 와중에 범죄와 싸우는 수많은 경찰관도 함께 매도당했고, 동네 파출소에까지 돌이 날아들곤 했다. 출세에 눈먼 소수의 ‘정치 경찰간부’들 때문에 다수의 경찰관이 긍지와 명예를 잃어버린 시기였다.
시대는 달라졌다. 지금은 누구도 경찰 배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순경 시험 경쟁률은 다른 어느 직종 못지않게 높다. 근무여건 개선 등 여러 변화가 있었던 탓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경찰이 권력에서 자유로워져 시민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살아난 경찰의 긍지가 땅에 떨어졌다. 어제 언론에 공개된 경찰청 문건은, 경찰이 다시 정권 안보의 최전선에 서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문건은 ‘전통적인 정부 지지세력을 복원하는 방안’과 ‘진보단체 등 반대세력의 포용 범위와 추진방안’을 수집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경찰 스스로 정치 집단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진보단체가 반대 세력이라면 경찰에 ‘우호적인 세력’은 어디인가? 촛불집회에 맞불을 놓는 극우단체와 보수 언론들이 경찰의 ‘친구’들인가?
경찰은 실무진의 실수라고 둘러대고 있지만, 경찰 수뇌부가 청와대·한나라당과 코드를 맞추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벌어질 수가 없다. 이명박 정부는 지금 보수 언론들의 충고를 그대로 따라서, 촛불집회 주도 인사들을 반체제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강경 진압을 꾀하고 있다. 경찰 역시 정권 핵심부의 이런 기류를 좇아, 전국 일선 경찰관들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청수 청장은 도를 넘은 시위 진압만으로도 이미 사퇴해야 했을 사람이다. 경찰청장에겐 임기가 보장돼 있긴 하다. 하지만 이는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자 도입한 제도다. 어청수 청장은 오히려 임기제를 방패막이로 삼아 정권에 충성을 하려고 하니, 제도란 게 이렇게 정반대로 활용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찰청 문건까지 공개된 마당에 어 청장은 더 치안총수 자리에 앉아 있을 명분이 없다. 오늘이라도 당장 스스로 물러나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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