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7.16 21:22
수정 : 2008.07.16 21:22
사설
법원이 경영권 불법승계 과정에서의 배임 및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대부분 무죄를 선고했다. 사실상 경영권 불법 승계를 법적으로 추인해 준 셈이다. 그런 결론에 맞춰 사실을 뒤틀고 억지 논리를 들이댔다는 비판을 받을 만한 대목도 한둘이 아니다. 권위의 보루여야 할 사법부가 사법 정의와 경제 정의를 함께 내팽개쳤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게 된다. 실망을 넘어 경악스런 결과다.
판결문의 논리는 궁색하기 그지없다. 재판부는 핵심 혐의인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에 대해 제3자 배정이 아닌 주주배정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기존 주주들이 전환사채 인수권을 받았으니 어떻든 주주배정이고, 이를 포기하는 것 역시 주주 스스로 재산권을 포기한 것이므로 헐값이라고 해서 회사에 손해를 끼친 배임은 아니라는 논리다. 삼성 쪽 주장 그대로다. 같은 혐의에 대한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 재판에서 서울고등법원이 형식적으로는 주주배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3자 배정으로 보고 유죄를 선고한 것과 정반대다.
사실, 주주배정을 한다면서 실권 몫은 제3자 배정을 한다고 결의하고, 곧바로 주주들이 실권을 선택해 97%를 이재용씨 남매에게 돌아가도록 한 게 정상적인 주주발행이라고 보기 어렵다. 재판부도 실권이 비서실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등 문제된 사실 관계를 상당부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주주배정이라는 결론은 고수했다. 제3자 배정으로 봤을 때 유죄 판결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을 피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나옴 직하다.
삼성에스디에스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혐의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판결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판결이 나오려면 이씨 남매의 이득액이, 긴 공소시효를 적용받는 중형 기준에 미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재판부는 특검과 행정법원, 국세청 등이 정상적인 신주인수권 행사 가격으로 인정한 5만5천원을 배척하고 낮은 가격을 적용했다. 주식가치를 평가할 때도 이씨 남매가 얻을 경영권 프리미엄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 결과 이씨 남매의 이득액은 기소 때보다 적어졌다. 일부러 봐주려고 꿰 맞춘 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공교롭다.
애초 삼성 사건은 글로벌 기업에 어울리지 않는 재벌의 전근대적 지배구조와 경영권의 불법 승계 관행, 비자금 따위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을 좋은 기회였다. 삼성 쪽이 이 전 회장의 2선 후퇴와 전략기획실 해체 등 스스로 쇄신 조처를 발표한 것도, 과거의 문제를 털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 탓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기대 속에 출범한 삼성 특검이 비자금 문제 등 핵심 의혹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한 부실수사로 일관하더니, 이젠 법원조차 경영권 불법 승계에 전면적인 면죄부를 주면서 그 역사적 책임을 방기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가 재벌 지배구조의 온존으로 치러야 할 비용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항소심 등 앞으로의 재판에서는 국민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만한 판결이 내려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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