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그제와 어제 사이,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잇따라 벌어졌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그제 저녁 반대하는 위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정부·여당의 추천을 받은 위원들만으로 <문화방송> ‘피디수첩’의 보도 내용에 대해 시청자 사과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어제 아침에는 수백명의 용역업체 직원들이 사원주주들의 출입과 발언을 막는 가운데 기습적으로 <와이티엔>(YTN) 임시주주총회가 열려, 40여초 만에 이명박 대통령의 방송특보 출신인 구본홍씨를 사실상 사장으로 선임했다. 벼락치기로 벌어진 이런 일들은 쿠데타를 떠올리게 한다. 두 사안 모두 정권이 관심을 두고 추진해 온 것이니, 촛불 민심에 잠시 숨죽였던 이명박 정부가 이제 국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방송 장악에 본격적으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날치기로 무너진 YTN의 방송 중립 용역업체와 날치기까지 등장한 와이티엔 주총은 방송 장악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한 것으로 봐야 한다. 1990년대 방송 민주화 투쟁 이후 대통령 특보 출신이 방송사 사장이 된 것도 유례를 찾기 힘들지만, 언론사 주총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처음이다. 그런 폭거를 무릅쓰고라도 제 뜻을 관철하겠다는 저돌성이, 바로 언론의 자유와 독립 등 헌법 정신은 물론, 그 토대가 되는 우리 공동체의 상식까지 찢고 할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정권 차원의 농단에 와이티엔의 일부 간부들이 힘을 보탰다는 것은 실망스럽다. 그들은 대주주의 위임을 받아 낙하산 인사를 방조했고, 후배 언론인들이 용역업체 직원들에 밀려 눈물을 뿌릴 때 이를 방관했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앞으로의 일은 더 걱정스럽다. 대통령 후보의 특보로 방송사 등을 찾아가 후보에게 유리한 보도를 주문했던 이가 방송사 사장이 됐으니,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에게 불리한 보도를 용납하진 않을 터이다. 그렇게 금기와 성역을 만들면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와이티엔이 개국 후 10여년 뉴스전문 채널로 애써 일궈온 공신력도 붕괴된다. 곧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 일은 장차 언론 전체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키게 된다. 파행 주총의 파장도 오래갈 것이다. 노조 등 회사 안팎에서 구씨의 사장 선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출근저지 투쟁과 방송 파행 등이 예상된다. 사원주주의 주총 입장과 발언을 막고 동의절차를 생략하는 등 절차적 흠도 주총 무효 주장으로 이어져 논란이 될 것이다. 그런 마당에 구씨가 사장으로서 제대로 권위를 인정받고 제 구실을 하긴 어렵다. 구씨 말고 낙하산 인사가 예정된 다른 방송사 등에도 이런 양상이 되풀이될 것이니, 역사를 되돌린 비용은 커질 수밖에 없다.방통심의위의 피디수첩 징계는 그 근거와 내용, 절차 모두 정당성이 의심된다. 무엇보다 언론의 보도 내용을 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부터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심의위가 문제 삼은 보도의 공정성과 공공성은 원칙적으로 보도 담당자와 시청자, 이해당사자들이 논쟁과 상호비판으로 해결하고 추구할 일이지, 행정기관의 제재 대상으로 삼을 일이 아니다. 언론자유를 중시하는 여러 나라에서는 심의기구가 음란물과 선정적 프로그램만 심의할 뿐, 시사보도 프로그램은 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제재의 칼을 들이대는 순간 언론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손상될 수 있으니 공론장의 독립은 철저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정부가 피디수첩에 대해 심의와 검찰 수사 등 제재 칼을 들이대면서, 탐사·고발 보도나 취재가 눈에 띄게 위축됐다고 한다. 이번 징계는 그런 마당에 언론의 자유를 결정적으로 위축시키는 일이다. 그로 말미암은 공론장의 붕괴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게 된다. 피디수첩 징계, 국가검열의 공식화인가 이런 심의 자체가 사실상의 국가 검열이기도 하다. 행정기관인 심의위가 피디수첩이나 <한국방송> 뉴스 보도의 내용을 나중에 문제 삼아 징계를 하는 것을 두고 국가 검열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하긴 힘들 것이다. 그 보도 내용에 대해 정부가 여러 경로로 불만을 표시하고 상반된 이해관계를 가졌다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이런 결정은 정부·여당 추천 위원들만으로 이뤄졌으니 정치적 이해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절차적으로도, 먼저 심의규정 위반 여부를 따지고 제재 여부를 정해야 하는데, 이번 결정은 완전히 거꾸로다. 막무가내인 힘의 논리가 방통심의위에도 통한 셈이다. 이런 구조라면 정치적 논란이 되는 사안의 보도 하나하나가 다 징계와 검열의 대상이 돼, 정상적인 보도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일이 여기서 그치진 않을 것이다. 당장 한국방송 사장을 갈아치우려는 압박이 계속되고 있고, 문화방송 민영화 등 방송 개편 구상도 진행 중이다. 그런 일들이 방송을 장악해 정권의 뜻대로 하려는 것이라면, 권력 감시가 큰 본분인 언론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게 된다. 이에 저항해 그런 시도를 저지하는 것은 언론으로서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당연한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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