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22 19:45
수정 : 2008.08.22 19:45
사설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를 수락산성당 주임 신부직에서 사실상 보직해임했다. 국외로 보내려다 받아들이지 않자, 안식휴가라는 명목으로 ‘의자’를 빼버린 것이다. 그동안에도 사제단 신부들에 대한 불이익 처분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눈에 두드러진 경우는 없었다.
이런 처분이 내려진 배경을 추정하긴 어렵지 않다. 사제단은 지난해부터 삼성 불법 비자금의 진상을 규명하고, 정권의 부당한 권력행사에 맞선 촛불집회에 힘을 보탰다. 이에 대해 교구청 쪽은 전 신부를 개인적으로 설득도 하고 그의 활동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제단과 전 신부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 인사가 이뤄졌으니 보복 의혹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서울교구청은 직무 정지를 시키지 않았으니 문책성 인사는 아니며, 삼성사건이나 촛불시위와도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본인이 원치도 않는 안식휴가를 강제로 명하고, 보통 3~5년 임기인 주임 신부직을 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회수했으니, 이런 주장이 귀에 들어올 리 만무다.
사실 특정 종교가 자체 제도에 따라 단행한 인사를 두고 외부에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겉으로 내세운 소금과 빛의 소명과는 반대로 그나마 있는 빛을 꺼버리고 어둠에 영합하는 차원의 인사라면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다. 사제단 신부들은 예수의 길을 따라 걷고자 노력해 왔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과 함께 있었으며, 억압당하고 수탈당하는 이들의 힘이 되고자 했다. 공의를 위해 당하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제단이 지금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물론 교회권력은 불편했을 것이다. 이들은 정치권력과의 마찰을 바라지 않으며, 기존 질서에 변화가 오는 것도 꺼린다. 하지만, 하느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활동을 드러내놓고 위축시킬 순 없었다.
등불이 빛을 잃고,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약자를 외면하고, 강한 자에 빌붙는 종교 역시 존재할 이유가 없다. 한국 가톨릭의 급성장은 빛과 소금의 직분에 충실했던 사제단에 의지한 바 컸다. 그러나 지금 가톨릭 교회권력은 그 등불을 끄려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되돌아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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