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02 21:01
수정 : 2008.09.02 21:01
사설
세계식량계획(WFP)이 어제 한국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 동참을 다시 요구했다. 이 기구는 지난달 우리 정부에 공식 서한을 보내는 등 올봄 이후 여러 차례 대북 지원을 요청한 바 있다. 우리나라가 국제기구로부터 연이어 대북 지원을 요구받은 것은 전례가 없다.
정부는 어제 “식량지원 결정을 하기 위한 프로세스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으나, 이제까지 정부 태도를 보면 지원 요청을 의도적으로 깔아뭉개는 듯하다. 지난주 열린 장관급 외교안보정책 조정회의와 차관급 안보정책 실무조정회의에서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강했다고 한다. 북한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 않는데 왜 식량을 줘야 하느냐는 논리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원 결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식량 사정”이라는 정부의 어제 설명은 지원을 안 하거나 늦추려는 변명에 불과하다. 북쪽 식량 사정이 급박하지 않다면 식량계획이 왜 지금 대규모 지원 사업을 추진하겠는가.
정부는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과 식량 지원을 사실상 연계하고 있다. 실제로 금강산 사건 이후 6자 회담 차원의 대북 지원을 제외한 모든 대북 물자 제공이 끊겼다. 남북 사이 인적 교류도 거의 중단됐다. 정부의 이런 강경 기조는 ‘인도적 지원은 다른 남북관계나 핵 문제 등과는 별개’라는 공식 입장과 모순되는 것은 물론, 나빠진 남북 관계를 푸는 데도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인도적 지원조차 꺼리는 상황에서는 남쪽 새 정부와 북쪽 당국 사이에 신뢰가 생길 여지가 거의 없다.
최근 한나라당 안에서는 대북 지원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여권 전체의 대북정책 기조가 바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점에서 다행스런 일이다. 정부 안에서도 전향적 대북정책을 지향하는 목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청와대의 태도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말 상생·공영의 대북 정책을 추구한다면 인도적 지원을 두고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 깔아뭉개기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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