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17 20:25
수정 : 2008.09.17 20:25
사설
서울 영등포경찰서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서예작품 ‘처음처럼’을 서각으로 만들어 일선 지구대와 파출소에 내걸려다 이를 무기한 보류했다. 국민에 봉사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말자는 뜻에서 선택한 글귀인데, 경찰 안팎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무기수 출신의 작품 아니냐’는 식의 논란과 문제 제기가 잇따른 탓에 방침을 바꿨다고 한다. 보류라지만 사실상 취소다.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한 경찰관의 한탄처럼, 좋은 뜻 대신 엉뚱한 것을 문제 삼는 태도들이 실망스럽다.
일선 경찰의 뜻을 가로막은 게 경찰 상층부의 판단인지, 보수 언론 등 외부의 지적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예술 작품에까지 작가의 전력을 들이대 금서와 금지곡을 양산하던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망령이 지금도 횡행한다는 것은 놀랍고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아도 이명박 정부 들어 일부 수구세력은 ‘좌파 척결’ 따위 철 지난 구호를 앞세워 억지로 이념 대립구도를 만들려 하고 있다. 유명 소주의 브랜드로 사용되는 등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는 신 교수의 서예작품 ‘처음처럼’을 두고도 ‘간첩의 글씨’라는 등의 막말이 있었다. 일선 경찰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 시작한 일을 억지로 되돌린 것도 그런 증오와 배척의 논리였을 게다. 그런 극단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수십 년 전으로 후퇴시킨다.
지금 국가보안법 위반의 전과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이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은 오래전부터 폐지 대상으로 꼽혔던 법이다. 이 법 위반으로 구속된 많은 이들이 나중에 재심 등으로 죄 없음을 인정받았다. 이 법 때문에 빨갱이로 지목받았던 사람 가운데는 집권당인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나 실세, 자치단체장도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이미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는 법으로 족쇄를 채우려 해선 안 된다. 또, 전과를 굳이 따지자면 국가보안법보다 더한 반란죄·내란죄·수뢰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글씨나 기념비가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 어귀에 남아 있는 것부터 문제 삼아야 할 게다.
신 교수가 20년20일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감한 지 이제 20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담백하고 기품 있는 글과 글씨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정화시켜 왔다. 그런 그에게 야만의 낡은 칼날을 들이대지 말라.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