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18 21:51
수정 : 2008.09.18 21:51
사설
이 정부 아래서 역사는 아무래도 권력의 노리개 혹은 전리품으로 전락할 모양이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의 후계자인 정치꾼과 수구집단이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 선동을 하자, 뉴라이트 계열 정치교수들이 수정 지침과 내용을 정리하고, 재계를 대표하는 상공회의소가 수정 의견을 낸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한데 정치적 중립을 생명으로 하는 군까지 이 예민한 정치적 사안에 끼어든 것은 아무래도 불길하다.
더 기가 막힌 건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국방부의 개정 의견이다. 전두환의 강압정치는 ‘친북 좌파의 활동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헌법 위에 군림했다는 박정희 관련 기술은 ‘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로, 또 분단상황을 독재정권 유지에 이용했다는 이승만 관련 기술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데 최선을 다했다’로 바꾸라는 것이다. 헌정파괴, 양민학살, 군사반란, 인권유린 따위를 칭송으로 대체하라니, 이 무모함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제주 4·3사건 부분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다. “대규모 좌익세력의 반란 진압 과정 속에 양민들도 다수 희생된 사건”으로 기술하라는 게 국방부의 요구다. 앞서 1999년 국회에서 여야가 다음과 같이 정의한 4·3 특별법을 제정한 사실을 국방부가 모를 리 없다.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 국민의 대표기관이 내린 정의까지 뒤엎으려는 것이니, 정치 군부의 망령이 떠오른다.
자신의 잘못이 기록되는 것을 반길 집단은 없다. 그러나 그런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 국가권력이 저지른 헌정파괴, 학살, 인권유린 따위의 잘못일 경우 특히 그렇다. 사실 판단부터 해석 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온전히 학계에 맡기고, 권력집단이나 이해관계자의 개입을 엄격히 막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정권이 역사 교과서, 곧 기억의 조작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려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금기가 하나 있다. 군은 끌어들여선 안 된다. 일단 정치의 장으로 들어서면 군은 주인까지 집어삼키는 괴물이 된다. 군의 개입이 군 통수권자의 생각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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