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12 23:09
수정 : 2008.10.12 23:09
사설
“학교에 책을 둘 데가 없어 시커먼 가방에 철학책을 한 보따리씩 넣고 다녔다. 어느새 학교엔 교수보다 강사가 더 많아졌다. 아이가 태어났고, 방학 중엔 늘 생활비가 빠듯했다. 그렇게 변한 것 없이 20년이 흘렀다.” 대학 시간강사에 교원 지위를 부여하라고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400일 넘게 천막농성이 진행 중이다. 이 농성에 참여한 21년차 시간강사 김용섭씨의 사연(<한겨레> 11일치 8면)은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의 얘기는 곧 이 사회의 시간강사들의 처지를 대변한다. 간간이 시간강사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곤 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시간당 3만~4만원을 받으며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교육개발원 자료를 보면 2007년 현재 전국 4년제 대학의 시간강사는 6만5399명으로, 전임교원 수(5만5612명)보다 많다.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시간강사 제도가 바뀌지 않는 데엔, 인건비를 줄이고 ‘비정규직 고용’의 편리함을 놓지 않으려는 대학 쪽의 책임이 크다. 지난 2월 모교인 미국 텍사스주립대를 딸과 함께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자살한 시간강사 한경선(44)씨의 유서에 실린, “대학 쪽은 비정규직이라는 점을 악용해 계약서를 유리하게 변경, 적용했다”는 대목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사학재단들의 눈치를 보면서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교육당국에 있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지난달 국회에 출석해, 시간강사 문제의 대책을 묻는 의원 질문에 “대책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대책을 못 세우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문제 해결의 의지를 느낄 수가 없다. 재정이 정 문제라면 교육예산을 확충하고, 사학재단과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려는 열의가 있어야 한다. 국회엔 시간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부여하는 법안이 이미 계류 중이다.
시간강사 문제는 단지 생존권 차원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다. 이들을 지금처럼 방치한다면, 대학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없을뿐더러 자유롭게 학문하는 지적 풍토의 확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이런 부분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정부와 국회는 시간강사들의 천막농성이 하루빨리 끝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개선책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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