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14 21:46
수정 : 2008.10.14 21:46
사설
학자들을 너무 얕잡아 봤다. 권력이 찍어누르면 학문적 양심을 포기하고, 권력의 요청에 순순히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역사 교과서 수정 압력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정면 반발에 부닥치더니, 이번엔 믿었던 국사편찬위원회마저 정권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벽에 봉착했다. 권력만 잡으면 학문의 내용까지 멋대로 좌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 정권으로선 참으로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정권이 아니다. 학문의 자율성과 자유, 교육의 중립성에 대한 아무런 고려도 없는 대통령은 이미 수정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런데 합리적 수단이 없다. 의지할 건 그저 권력의 힘뿐이다. 합리성과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이 정권은 국사편찬위의 자발적 협조를 기대했다. 신호도 여러 차례 보냈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이고, 이 정권이 임명한 위원장이 이끄는 곳이니 그런 기대를 가질 법도 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 심의위원들의 반발은 차치하더라도, 위원장마저 정부의 행태에 유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역사학을 죽이는 짓에 어느 누가 동조할까. 이제 역사를 정권의 이데올로기 교과서로 만드는 데 국사편찬위를 동원하려던 계획은 접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이달 말까지는 수정 사항을 확정해 통보해야만 11월 중순에 인쇄에 들어갈 수 있고, 내년 1학기부터 이 교과서를 쓸 수 있다. 결국, 교육과학기술부가 직접 수정 사항을 결정하고, 그저 안전판이자 훈시규정이었던 장관의 수정 명령권을 발동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부려쓴 적이 없는 권한이다. 검정체제의 취지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조처이기 때문이다. 장관, 곧 정권 마음대로 교과서를 수정할 수 있다면 그건 국정이지 검인정 체제가 아니다.
검인정 체제는 역사학계의 숙원이었다. 국정 체제는 정권이 선택하고 인정하는 단 하나의 역사, 단 하나의 해석만을 허용한다. 그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관점은 설 자리가 없고, 역사학은 다양성을 상실하고, 역사는 이데올로기 전파의 수단이 된다. 학계의 숙원이 이뤄진 것은 1997년, 유신체제 등장과 함께 국정으로 변질된 뒤 23년 만이다. 그것을 이 정권이 다시 뒤집어놓겠다고 하고 있으니, 이 정권은 무엇을 꿈꾸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다시 유신시절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학문까지 누더기로 만들지 말고, 거덜나는 나라 살림이나 걱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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