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30 19:45
수정 : 2008.10.30 19:45
사설
정부가 결국 검인정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수정 권고안을 발표했다. 말이 권고이지 사실상 지시다. 채택권을 쥐고 있는 정부가 대통령부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여당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바꾸겠다”고 공언했는데, 그걸 어떻게 권고라고 할까. 검인정 체제의 근간을 파괴했다는 비난이 우려된다면 그런 짓을 하지나 말 일이지, 참으로 낯이 두껍다.
수정 요구 내용은 예상했던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지적 능력의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아니면 자폐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일장기가 걸렸던 자리에 태극기가 아니라 성조기가 걸린 것이 어찌 민족사의 불행이 아닐까. 자력으로 광복으로 이뤄졌다면, 당연히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친일파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현대사가 왜곡된 것도 사실 아닌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못하거나, 사소한 관점의 차이까지도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정안은 집필자에게 ‘곧바로’를 빼라, ‘이른바’를 넣어라 따위의 코미디 같은 지시도 했다. 문장 첨삭까지도 정부가 관장하려는 것이다.
내용보다 더 큰 문제는 절차다. 권고와 설득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정부가 직접 검인정 교과서 수정을 강제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망신이기 때문이다. 이 정권이 출범과 함께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내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라고 요구하고 윽박지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결국 정부가 수정안을 만들어 통보했다. 이는 국정 체제로의 회귀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국정 체제는 박정희 정권이나 북한처럼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시행했다. 국정 체제에서 학생은 정부가 허용하는 사실, 관점, 해석만 읽고 달달 외워야 한다. 사고력과 창의력, 문제해결 능력은 물론 각자의 능력을 개발할 수 없는 건 당연지사. 그런 까닭에 자유세계에선 이미 20세기 초부터 다양한 교재를 통해 다양한 경험과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교과서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검인정 체제는 그 결과물의 하나다. 요즘은 검인정으로도 부족하다 하여 자유발행에 준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역사에 이어 경제, 사회, 윤리 교과서까지 손을 볼 태세다. 그렇게도 전체주의가 그리운가. 역사 왜곡을 일삼는 일본 극우파도 검인정의 정신을 훼손하려 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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