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번엔 문화체육관광부가 일을 저질렀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내용의 책자를 전국 초·중·고교와 대학, 군부대, 정부기관에 3만여부나 뿌렸다. 교육과학기술부가 4·19 혁명을 단순한 ‘시위 또는 데모’로 깎아내린 홍보물을 배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난 8·15 기념식을 앞두고 여권에서 제기한 건국절 논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쿠데타로 집권한 권력도 아닌데, 헌법 정신을 한사코 부정하려는 이 정권의 태도가 불가사의할 뿐이다.
문화부 책자는 종합판에 해당한다.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봐야 하고, 건국의 공로는 당시 정부 수립에 참여한 인물들이라고 주장했다. 건국절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셈인데, 이는 임시정부의 법통과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고, 반쪽 정부 수립과 이승만 독재를 미화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건국절로 명명되는 순간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
책자는 또 미군정기를 한국 민주주의의 모태라고 서술했다. 일제 식민지 체제를 근대화의 모태라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한 쌍을 이룬다. 일제와 미군정을 대한민국의 모태로 삼자면 당연히 임시정부 법통은 부정돼야 하고, 친일파의 집권과 독재를 미화하자면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와 4·19 혁명은 지워져야 한다.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관과 이념이 일목요연하다.
그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논란이 생길 때마다 한편에선 부채질하고 다른 편에선 발을 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건국절 논란 때나, 교과부 책자 때도 그랬다. 그런 그가 엊그제 자신의 속내를 비교적 솔직히 드러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국가 정체성 확립을 경제살리기, 개혁과 함께 3대 과제로 꼽았다. 이런 헌법 정신을 모독하는 책자가 계속 나오는 이유를, 대통령 자신이 설명한 셈이다.
문제는 이 대통령과 이 정권한텐 그런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헌법을 무시하면서 국가 정체성 확립을 운운할 수는 없고, 기본권을 유린하고 공포정치와 관치경제를 되살리면서, 게다가 자유와 민주주의 파괴자인 독재자들을 칭송하면서 자유민주주의 확립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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