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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16 23:27 수정 : 2009.02.16 23:27

1951년 사제 서품을 앞두고 그가 고른 성구는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였다. 그런 그가 어제 선종하면서 남긴 말은 “고맙습니다” 한마디였다. 그는 그렇게 낮은 곳에서 온전히 헌신하며 살았다. 이제 그는 그가 따르던 분의 부름에 따랐고, 세상은 어둠을 밝히던 큰 별 하나를 잃었다.

그를 이끌어온 것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었다. 서구 중심의 세계관과 가톨릭의 독선에 갇혀 있던 교회의 문을 열고, 다른 종교, 다른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도록 한 게 2차 바티칸 공의회였다. 공의회를 계기로 검은 피부의 그리스도도 등장했고, 서구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민중의 해방을 추구하는 해방신학도 용인됐으며, 다른 종교의 구원 가능성도 인정하게 됐다.

그가 1968년 서울 대교구장 취임식에서 한 이 말은 공의회의 정신을 그대로 담은 것이었다. “교회의 높은 담을 헐어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합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암흑기 동안 이 다짐은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다. 교회는 가난하고 억눌리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그는 불의한 권력과 맞서 싸웠다.

이미 전설이 되었지만, 박정희가 영구집권의 길로 들어서던 1971년 성탄 자정미사에서 그는, 당시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독재와 공포정치를 규탄하는 강론을 했다. 생중계하던 방송은 갑자기 광고만 흘려보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때 명동성당 농성을 강제해산하려는 정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들을 체포하려면 먼저 나를 밟고, 다음에 신부들과 수녀들을 밟아야 할 겁니다.”

그가 우리 사회의 가장 존경스런 종교인으로 꼽혀온 것은 당연했다. 우리 사회는 종교적 차이를 떠나, 그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의 회고처럼 그 시절 그는 “이념이나 정치적 의도를 갖고 한 일은 없었으며, 오로지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영향력이 너무 컸던 탓일까. 정치권은 끊임없이 그를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그 역시 인도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했다. ‘세도사건’의 이회창씨를 위로하는 따위의 일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등불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법. 그의 삶이 관통했던 저 어둠의 시대 속에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찬란히 빛나는 빛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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