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12 20:41
수정 : 2009.03.12 20:41
사설
1987년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테러 사건의 범인 김현희씨가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의 가족을 그제 만났다. 김씨는 평양에서 이은혜란 이름이던 다구치로부터 일본어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 다구치의 아들이 한 살 때 생이별한 어머니 소식에 애태우는 모습을, 많은 이들이 안타까운 심경으로 지켜봤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을 납치하고 혈육을 떼어놓는 일은 분명한 범죄행위다. 북한은 2002년, 과거의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고 사과했다. 이제는 그 해결에 한층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옳다.
문제는 이런 인도적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불순한 의도에 있다. 일본은 이번 만남을 계기로 대북 압박을 한층 강화할 태세다. 한국까지 여기 끌어들이려 한다. 그런다고 납치 문제가 쉽게 해결될지 의문이지만, 자칫 북한과의 대결 양상이 굳어지면 중대한 전환점을 맞은 북핵 6자 회담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니 걱정이 안 될 수 없다.
일본의 이런 태도가 과거 식민시대에 저지른 온갖 범죄행위는 외면한 채 자신을 되레 피해자인 양 내세우려는 의도라면,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번 만남이 이뤄진 데는 납치 문제를 쟁점화해 지지율을 올려보겠다는 아소 다로 내각의 속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일에 멍석을 깔아준 셈이 된 한국은 인도적 사안에 협력했다는 명분은 얻었을지 몰라도, 꼬일 대로 꼬인 남북관계에 대한 부담은 더 커지게 됐다.
더욱이 보수성향 언론들이 지난 정부의 ‘칼기 폭파 조작설’ 개입 논란을 부풀린 것은 보기 흉하다. 김씨는 지난해 말에도 노무현 정부의 국가정보원이 일부의 조작설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논란에 대해선 이명박 정부 들어 국정원이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는데도 아무런 근거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국정원 출신인 한나라당 의원까지 김씨가 뭔가 오해한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근거 없는 음모론을 부추기고 있으니, 반대세력에 친북이나 반국가 따위 색깔을 칠하려는 행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논란 자체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김씨는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희생시킨 항공기 테러의 범인이다. 혈육을 잃은 유족들 앞에서 자유투사인 양 나설 처지가 아니다. 그런 김씨를 내세워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세력들은 더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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