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3.25 20:17
수정 : 2009.03.25 20:17
사설
법원이 태안 앞바다 기름오염 사고의 주범 삼성중공업의 배상책임 한도를 56억원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크레인 예인선단이 정박중인 유조선을 들이받아 해안국립공원 생태계를 유린하고 주민 삶을 초토화했는데, 법원은 주민들의 한 달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책임만 삼성중공업에 지운 것이다. 삼성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 법원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해 착잡하다.
고의나 중과실을 찾을 수 없었다는 재판부의 설명은 군색하기만 하다. 예인선단은 풍랑주의보가 내려졌는데도 항해를 강행했다. 항해 중 항로를 이탈할 정도로 기상이 악화됐는데도 피항하지 않았다. 뒤늦게 유조선을 발견하고 무리하게 항로를 변경하려다 예인줄이 끊어져 크레인은 유조선으로 돌진했다. 긴급경보를 청취할 수 있도록 조처하지도 않았고, 충돌 위험이 있는데도 관제센터나 유조선에 연락해 피항하도록 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과실이 아니고 무엇일까.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작정하고 들이박아야 고의나 중과실이 인정되는 걸까.
다른 나라의 사례에는 왜 눈과 귀를 닫았을까. 1989년 엑손 발데즈호 사고 때 미국의 1심 재판부는 2억8700만달러의 손해배상과 50억달러의 징벌적 배상금을 선고했다. 우리처럼 선주책임제한법이 있지만 이를 적용하지 않았다. 엑손은 법정 다툼을 계속하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방제 및 환경복구를 위해 10억달러 이상 지출했다. 1999년 프랑스 법원은 폭풍우 속에서 항해하다 침몰한 에리카호 유류오염 사고와 관련해 불량 유조선을 임차한 토탈 등에 2600억여원의 배상금을 물렸다. 2002년 스페인 해역에서 폭풍우로 침몰한 프레스티지호 사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급심도 있으니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검찰이나 법원의 태도를 보면 국민을 삼성중공업의 머슴쯤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사고는 삼성중공업이 냈다. 그러나 해변을 뒤덮은 기름찌꺼기를 걷어낸 것은 국민이었다. 오염보상기금의 보상한도를 넘는 피해액도 국민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2006년 철도노조의 나흘간 파업에 대해 배상금 70억원을 내도록 판결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제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법원이 보기에 그 책임이, 수만 주민의 삶을 초토화하고 환경 재앙을 초래한 대기업의 책임보다 더 컸던 셈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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