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06 21:17
수정 : 2009.04.06 21:17
사설
‘장자연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유력 언론사 대표의 신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공개됐다. 그동안 귀엣말로만 오가던 얘기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에 힘입어 비로소 직함과 성씨로 거론된 것이다. 실명이 다 나온 것은 아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범죄 피의자의 신원 공개는 무죄 추정의 원칙 등 헌법과 형사법의 여러 원칙으로 보면 찬성하기 힘든 일이긴 하다. 하지만 성범죄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데는 우리 사회가 이미 대체로 합의를 해온 터다. 사회 유력 인사들이 여성 탤런트에게 접대를 받거나 강요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번 ‘장자연 사건’은 이권과 편의 따위를 대가로 성을 사고팔았다는 점에서 다른 성범죄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유력 인사들이 사회에서 지닌 힘을 내세워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책임 역시 우리 사회가 따져 묻는 게 당연하다. 이는 우리 사회의 비리 구조를 바로잡는 것이니 공적인 의미 또한 작지 않다. 그런 점에서 국회가 이 문제를 다룬 것은 그 책무를 한 것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수사를 맡은 경찰의 태도다. 장씨에게 성접대를 받았다는 유력 인사들을 감추기에 급급했으니, 경찰 수사가 제대로 됐을 리 없다. 경찰은 사건 실체를 확인해줄 장씨의 전 소속사 대표의 강제송환에도 나서지 않는 등 대놓고 미적대고 있다. 실제 성접대가 있었는지를 규명하기는커녕 이를 고발하는 문건의 진위를 따지는 데서 크게 벗어나려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경찰은 나아가 장자연 리스트에 들어 있다는 유력 인사들을 변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수사를 하기도 전에 미리 선을 그어둔 셈이다. 경찰에 나오길 꺼리는 조사 대상자는 소환 대신 방문 조사를 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니 경찰이 언론사 눈치를 보면서 조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경찰 안팎에서 결국엔 유력 언론사 대표 말고 힘이 덜한 사람들만 처벌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게 입길에 오른 언론사가 실제로 보도나 막후 압박을 통해 경찰 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았는지 묻는 소리도 나온다.
오늘은 장씨가 목숨을 끊은 지 꼭 한 달 되는 날이다. 그의 죽음으로 세상에 드러난 우리 사회의 치부를 또다시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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