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01 21:26
수정 : 2009.05.01 21:26
사설
다시 5월이다. 그때 나이 어린 누이들의 손에 들렸던 작고 여린 촛불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로 타올랐다. 광장에 차고 넘쳤던 함성과 노래와 춤 그리고 촛불은 5월의 신록처럼 눈부셨다. 그래서 5월은, 혁명의 4월, 항쟁의 6월과 함께 민주주의를 밝히고, 평화를 노래하며, 형제애를 나누는 계절이 되었다.
우리의 누이들이 촛불을 든 것은 단지 미친 교육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나온 것은 먹거리 문제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속아 광장으로 밀려나온 것도, 광기에 사로잡혀 숱한 밤을 지새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황폐해지는 삶과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살풀이이자 대동제였다. 국가가 주권을 포기하고, 국민주권을 훼손하며, 공공성을 파기하고, 공동체를 형해화하려는 정치권력에 대한 전혀 새로운 형식의 저항이었다. 광장의 논의가 광우병뿐 아니라 교육, 보건, 의료, 세금, 막개발 등 삶의 문제 전반으로 확장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물론 크게 바뀐 것은 없다.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사과하고, 대운하를 중단하고, 의료·수도·가스 민영화를 추진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긴 했다. 그러나 촛불이 식자, 그는 대운하를 4대강 살리기로, 민영화는 선진화 따위로 이름만 바꿔 추진한다. 이와 함께 교육을 초등생부터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인성과 잠재력을 파괴하도록 개조하고, 사교육비로 가계를 휘청이게 했다. 정규노동자는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은 거리로 내몰았고, 청년들의 꿈을 시들게 했다. 부자의 세금은 대폭 깎아주고, 다시 들썩이는 집값으로 서민들의 불안은 키웠다. 온라인은 물론 오프라인에서의 감시와 통제는 강화되고, 공권력의 폭력은 날로 심해졌으며,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유린되고 있다. 생존권을 요구하던 세입자들이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용산참사는 이 정권의 퇴행을 상징하는 참변이었다.
그래서 촛불집회는 어느 봄날의 한갓된 꿈이었다는 냉소도 나온다. 중산층 운동 혹은 비조직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도 나왔다. 그러나 1968년 세계를 휩쓴 6월혁명이 그러했듯이, 촛불은 지금도 우리 가슴에 살아남아 우리의 의식과 삶과 가치를 바꾸고 있다. 정치권력, 재벌, 언론 등 수구 복합체의 거짓과 위선 그리고 모략을 고스란히 드러냈고, 이런 각성은 4·29 재보선 결과로 이어졌다. 강고하게만 보이던 이 복합체는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폭정과 민주주의의 퇴행은 잠시일 뿐이다. 미래는 꿈꾸는 이에게 있고, 어둠은 빛에 길을 내준다. 촛불의 꿈은 봄날의 한갓된 환영이 아니라, 고통의 현실을 이겨내고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으로서 꿈이다. 이 정권이 지금도 국제적인 조롱을 당하면서까지 촛불을 탄압하는 데 혈안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제 다시 연대를 이야기하자. 소외되고 억압당하는 이웃들, 특히 이 시대의 모순을 짊어진 비정규직, 청년 실업자, 소수자들과 손을 맞잡고 시대의 어둠에 불을 밝히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