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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14 20:48 수정 : 2009.05.14 20:48

사설

21년 전 오늘, <한겨레>는 6만여 주주가 치켜든 민주·민생·통일 그리고 참언론의 기치 아래 탄생했다. 그것은 냉전 독재의 동토를 뚫고 솟아오른 들풀 같았다. 그날 첫 함성은 5월의 신록보다 더 눈부셨다.

지금도 그 기치는 여전히 꼿꼿하다. 그러나 왜 아직도 민주·민생·통일·참언론인가.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저 앞에는 한 차원 더 높은, 신뢰와 연대, 관용과 형제애의 기치가 기다리고 있다. 더 행복한 삶, 더 따듯한 공동체에 대한 열망 역시 가득하다. 여전히 선명한 한겨레 창간 기치를 보는 마음 그다지 편치 않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삶의 질을 중시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퇴행을 걱정했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나 인권 자체의 후퇴가 아니었다. 시장만능주의가 중산층과 서민의 삶을 파괴하고, 맹목적 개발주의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깨뜨리며, 성장 일변도의 정책이 교육과 의료 복지의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교육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세습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의료의 공공성을 깨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물과 전기도 영리추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업국가형 경제정책은 고용의 양과 질을 추락시켰다. 비정규직은 800만명을 넘었고, 체감 청년실업률은 20%에 이른다. 4대강 사업은 자연생태계의 안정성을 불가역적 상태로 파괴하려 한다. 때마침 맹목적 시장주의의 모순이 지구적 차원에서 터져,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을 발본적으로 전복시키고 있지만, 한국에선 요지부동이다.

민주주의와 인권마저 퇴행

퇴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설마 했던 민주주의와 인권에서마저 급격한 퇴행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소통의 위기, 신뢰의 위기, 삶의 위기를 자초한 정부·여당은 정권안보 차원에서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금자탑마저 허물고 있다. 한국의 표현의 자유는 이미 국제적 웃음거리가 되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방송 또는 인터넷 검열기구로 변질됐다. 집회와 시위는 허가제로 전락했으며, 공권력은 공공의 안전이 아니라 정권의 안전을 위한 몽둥이로 회귀했다.

인권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마저 정치적 외풍에 흔들린다. 재판 간여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가 대법관에 임명됐고, 판사들의 집단저항에도 그 자신이나 대법원장은 오불관언이다. 사정이 이러니 검찰은 법원의 명령에도 수사기록의 열람을 거부한다. 국민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부정당하고 있다. 삶의 질을 고민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민주사회의 기본 전제마저 위협당하고 있는 것이다.


냉전의 망령도 부활한다. 서해 5도 주변엔 불온한 기운이 흐르고,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인 개성공단은 생명유지장치로 지탱하는 신세다.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도 봉쇄됐다. 진지한 소생 노력도 소생 계획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남쪽에선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각종 도감청 등 사생활 검열이 강화된다.

강고한 연대로 비상을

민주·민생·통일의 창간 기치를 다시 높이 세우려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퇴행의 모든 원인을 정권에만 돌릴 순 없다. 우리 자신에게도 그들 못지않은 허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른바 민주세력은 한때의 성공에 자만했고, 스스로 퇴행의 길을 열었다. 인간적인 가치들보다 경제적 실용을 선행시키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국민의 정부였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며 자본의 기획에 따르기 시작한 것은 참여정부였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성장은 지고지선의 가치로 변했고, 시장만능주의는 이를 실현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됐다.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억압하고, 세대간 착취와 배제가 이뤄지며, 공멸을 향한 맹목적 경쟁만 판을 친다.

그렇다고 냉소와 자학에 빠질 일은 아니다. 역사는 진보해왔고 진보한다. 다만 사람의 뜻대로 진보하지 않을 뿐이다. 반성은 민주·민생·통일 그리고 참언론의 기치를 이 땅에 굳건히 뿌리내리려는 각오로 이어져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적 가치가 꽃피는 행복한 공동체를 향한 헌신과 희생의 다짐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우리는 이 시대의 모순을 짊어진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소모품이 돼버린 비정규직, 꿈을 빼앗긴 청년들, 경계 밖으로 내몰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이들이야말로 그 모순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킬 수 있는 주체다.

한겨레는 시대의 절망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이들이 일궈낸 민주화의 상징이다. 한겨레는 그 꿈을 기억한다. 그들이 이루려는 세상을 기억한다. 창간 스물한 돌, 걷잡을 수 없는 퇴행의 시대를 맞아 한겨레는 다시 허리띠를 동여맨다. 한편에 억압받는 이들, 다른 한편엔 양심적 지식인과 노동자, 시민사회와 기업인의 손을 잡으려 한다. 그리고 민주·민생·통일을 넘어 평화의 공동체로 비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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