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21 22:25
수정 : 2009.05.21 22:25
사설
대법원이 어제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는 첫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환자가 자기결정권에 따라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존엄사’의 길이 열리게 됐다. 기계장치에 의한 생명 연장보다는 존엄사를 택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헌법상 행복추구권에도 부합할 수 있다는 취지다.
많은 말기 환자들이 심폐소생술과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연명치료를 받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족과 의사의 암묵적 동의 아래 법적 근거 없는 연명치료 중단이 공공연하게 벌어진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나름대로 기준을 제시해 존엄사 합법화의 길을 연 것은 불가피한 조처로 보인다.
존엄사의 길이 열린 이상 서둘러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의료 현장에서 혼선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병원이 최근 마련한 사전의료지시서 작성 방안은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본인이 뚜렷하게 판단할 수 있을 때 미리 연명치료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이어서 환자의 자기결정권 행사라는 법적 취지에도 부합한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이 제시한 연명치료 중단의 조건은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로 진입’과 ‘환자의 의사 확인 또는 추정’이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대해 “의식 회복 가능성이 없고, 중요한 생체기능을 상실했으며, 짧은 시간에 사망에 이를 수 있는 경우”라고 규정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뇌 기능이 일부 살아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구체적인 세부지침이 마련돼야 한다.
가족들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해 판단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오용될 가능성이 있다. 말은 환자 뜻이라고 하지만 결국 가족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가족들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연명치료 중단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사태가 우려된다. 이는 연명치료 중단의 근거를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두고 있는 판결 취지에도 어긋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존엄사 관련 법안이 한시바삐 마련돼야 한다. 구체적 요건과 절차를 법으로 정해 존엄사 제도가 잘못 활용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특히 뇌출혈 등 돌발 상황에 의해 식물인간이 된 환자가 많다. 본인 의사를 확인하거나 추정할 수 없는 경우 연명치료 여부를 어떻게 결정할지 등에 대한 현실적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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