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22 21:49
수정 : 2009.05.22 21:49
사설
“오욕의 역사가 남긴 뼈아픈 교훈을 가슴 깊이 되새겨 법관으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가다듬으면서, 선배 법관들을 대신하여 억울하게 고초를 겪으며 힘든 세월을 견뎌온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밝힙니다.”
그제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는 1981년 ‘아람회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에서 이렇게 밝히면서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 및 면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당시 신군부 세력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국민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고등학교 동기동창생들의 친목회를 반국가단체·좌익용공 세력으로 둔갑시켰다고 판시했다. 이들을 옭아맸던 공소 사실과 증거도 모두 고문과 가혹 행위로 조작됐다고 밝혔다.
이런 진실이 뒤늦게라도 밝혀진 것은 다행이다. 국가 폭력에 의한 인권 유린이 더는 용납될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도 돋보인다. 하지만 28년 만의 무죄 판결로 피고인들과 그 가족의 한이 다 풀릴 수는 없다. 피고인 가운데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지금껏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도 있다. 이들의 삶은 그동안 송두리째 뒤집히고 무너졌다.
이들의 절규를 외면한 당시 법원도 역사의 법정에선 공범이다. 경찰이 강제 연행과 물고문·집단구타 따위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검찰이 피고인과 증인들을 윽박질러 조작 사실을 감추려 드는데도 당시 법관들은 이를 모른 체하며 중형을 선고했다. 권위주의 공포 정치에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행태가 법치주의와 인권의 보루여야 할 사법부 본연의 구실을 외면한 것임은 분명하다. 재심 법원의 판시대로, 권력이 진실에 반하는 요구를 하고 이를 거역할 경우 극심한 불이익을 받게 되더라도 법원은 마땅히 진실을 말하는 힘없는 소수의 편에 서야 한다.
그런 반성은 오늘의 사법 현실에서 다시 되새겨야 한다. 불의에 분노한 평범한 시민들이 권력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억울한 고초를 겪은 것처럼, 지금도 정부 정책에 의문을 제기한 촛불 시민과 누리꾼, 언론인들이 엉뚱한 혐의로 체포되고 기소된다. 고문만 없을 뿐, 헌법과 법률을 무시한 과잉 진압과 집회 원천봉쇄, 인권을 무시한 수사 따위 국가 폭력의 위험도 여전하다. 지금의 사법부 역시 그런 민주주의 퇴행을 걱정하는 시민들의 호소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거듭 되돌아봐야 한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