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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그대, 별과 달로 속히 돌아오소서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제 영면에 들었다. 비와 바람 그리고 꽃과 나비가 그러하듯이 그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민주주의와 인권, 화해와 평화를 향한 그의 행진도 멈췄고, 고난과 영광, 시련과 보람의 파란만장한 삶도 거기서 그쳤다. 세계 각국에서 이어지던 조문 행렬도, 그와의 영원한 이별을 서러워하는 탄식도 바람처럼 흩어진다. 우리 시대의 태양은 산 너머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가 그냥 떠난 것은 아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와 인권과 한반도 평화에 노심초사했듯이, 그는 마침내 죽음까지도 남북의 굳게 닫힌 빗장을 푸는 데 내줬다. 남북의 육로와 기찻길 그리고 통신망이 복구되고, 얼어붙었던 남북 당국이 대화의 자리에 앉았다. 편견과 오만, 무관심과 무지는 여전하지만, 그는 죽음으로써 우리 사회가 용서와 화해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도록 했고, 이해와 관용에 마음을 열도록 했다.
특히 그의 죽음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 누가 왜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려 하는지, 자본과 권력은 왜 민주주의를 왜곡하려 하는지 의심을 품게 했다. 민주주의와 밥 가운데 택일을 강요하는 수구·보수언론의 기만도 눈치채게 했다. 길고 긴 조문 대열의 상당수는 그와는 한두 세대나 차이가 나는 세대였다. 그에 대한 기억이 있을까마는, 그가 끝끝내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가치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왜곡된 민주주의가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도 똑똑히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세계인의 기억 속에 그는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그를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했고, 미국 보수일간지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을 군부독재 체제에서 민주주의의 본고장으로 만든 사람’이라고 꼽았다. 그러나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그의 이런 영웅적 삶을 떠받쳐온 것이 바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소망하고 자신을 낮추는 삶의 자세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마지막 날까지 그는 차가운 거리로 내쫓기는 빈민들을 보고 찢어지는 아픔을 호소했다. 자신을 사형대에 세우려는 이들을 저주하고 보복하기는커녕,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했다. 이를 위해 그는 늘 자신의 하느님께 용서를 위한 용기와 힘을 간구했다. 아내를 존경하고 섬겼고, 마찬가지로 다른 여성들을 존중했고 이웃들을 섬겼다. 사회적 악과 끝까지 맞설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런 사랑과 믿음이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29년 전 ‘사형수 김대중’과 기이할 정도로 닮았다. 짧게 깎인 머리카락 때문은 아니다. 그는 이미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도 영면 때처럼 마음속 평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가 미워한 것은 죄였지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저 영웅적인 등대가 아니라 소박한 마음속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울부짖음과 같다.” 어두운 밤 갈 방향을 일러주고, 가야 할 길을 비추던 별과 달이 사라졌으니 그 황망함 얼마나 크고, 거목이 사라졌으니 상실의 불안과 슬픔은 어떻게 위로받을까.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지증대사를 추모한 이 웅혼한 문장은, 오늘 다시 그 장중한 울림으로 우리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별이 숨으면 신새벽이 멀지 않고, 달이 지면 여명이 다가올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다시 허리띠를 동여매고, 신발끈을 조인다. 오늘 우리의 이 비통한 마음은 간절한 사모의 정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절망과 좌절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지극한 슬픔은 이제 아침을 빛내는 이슬로 맺히고, 이슬은 방울방울 모이고 또 모여 도저한 물줄기를 이룰 것인즉, 민주주의의 행진은 다시 시작할 것이다.
이미 다시 바람은 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민주주의의 바람은 일기 시작했다. 이제 김 전 대통령이 멈춘 바로 그 자리에서 거역할 수 없는 대오로 행진은 시작해야 한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의 종언을 운운하는 이도 있지만, 종언을 고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아직 어둠이 가득한 이 시대, 고인은 우리 마음속 별과 달로 속히 돌아와, 나아갈 방향을 이르고 숨은 길을 밝히 드러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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