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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아전인수식 ‘화해와 통합’을 경계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화해와 통합이 정치권의 최대 화두가 됐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어제 민주당 쪽에 대표 회동을 제안하면서 “김 전 대통령의 국장을 계기로 국회가 대화와 상생의 장으로 거듭나자”고 강조했다. 민주당도 언론관련법 날치기 처리 이후 계속돼온 원외투쟁의 지속 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라디오·인터넷 정례연설을 통해 “이제 갈등의 시대, 미움의 시대를 끝내고 통합의 시대, 사랑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에 모처럼 화해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현상은 반가운 일이다. 여야 사이에 끊겼던 대화가 복원되고 국회가 제구실을 하기를 바라는 기대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여야의 모습을 보노라면, 제 논에 물대기식 화해와 통합을 외치고 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여권의 태도는 그렇다.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앞세워 야당에 국회 복귀를 압박하면서도, 정작 정국 파행의 원인인 언론관련법 날치기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냥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자는 식이다. 물론 야당도 ‘국회가 최고의 투쟁장소’라는 김 전 대통령의 철학을 다시 음미해볼 필요는 있다. 하지만 정치 복원을 위해 먼저 매듭을 풀어야 할 쪽은 어디까지나 여권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 대통령의 태도다. 이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화해와 통합을 강하게 역설했지만, 분열과 갈등의 원인 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 일기에서 언급한 ‘용산참사의 야만성’이나 ‘강압일변도의 국정운영’ 등 껄끄러운 지적은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가 역력하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강조하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요된’ 자살에 대한 유감 표명은 이날 연설에도 없었다. 오히려 “이념갈등이 약화되고 통합의 흐름이 시작되고 있는데 유독 정치권만이 이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등 정치권을 질책하는 데 몰두했다. 그리고 선거제도 및 행정구역 개편만이 통합의 모든 것인 양 이야기했다.
진정한 화해와 통합은 원인 제공자 쪽이 먼저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제 잘못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화해와 용서를 강요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화해와 통합은 고사하고 갈등과 분열의 골만 더 깊어진다는 것을 이 대통령과 여권은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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