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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비핵·개방 정책 모순 드러낸 ‘일괄타결 제안’ |
미국을 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핵 일괄타결을 제안했다.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데 발맞춰 핵 외교 구상을 밝힌 셈이다. 하지만 기존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 깔려 있지 않아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제안의 핵심은 “6자회담을 통해 북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을 폐기하면서 동시에 북한에 확실한 안전보장을 제공하고 국제지원을 본격화하는 일괄타결”이다. 완전한 핵 폐기로 이어질 초기 이행 수준을 이전보다 대폭 높이되 더 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이다. 핵 협상 시작을 앞두고 구체적 제안을 내놓으려는 나름의 고민이 엿보인다. 곧 있을 북-미 대화를 앞두고 쉽게 합의하지 말라고 미국에 촉구하는 뜻도 있다.
이번 제안은 선 핵폐기를 전제로 대규모 대북 지원을 하겠다는 비핵·개방 3000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이미 충분히 드러난 이 정책의 문제점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무엇보다 ‘북핵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 폐기’는 협상이 상당히 진척돼야 이뤄질 수 있음에도 거기까지 과정이 생략돼 있다. “북한이 핵 포기 결심을 내린다면 새 평화구상을 추진하겠다”고 한 이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와 비교해도 후퇴한 수준이다. 현실적으로 핵 협상을 주도하는 나라는 미국과 북한인데도, 협상 지렛대조차 확보하지 않은 채 선 핵폐기만을 주장해서는 관련국의 호응을 얻을 수가 없다. 5자회담을 변형한 5자협의에 계속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부적절하다.
남북관계를 핵 문제에 종속시키는 이제까지 태도를 답습한 것 또한 큰 문제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북한과 협력하고 대화하더라도 핵 문제의 해결이 주된 의제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금강산·개성 관광 재개와 인도적 지원 등 남북관계를 풀려는 기본적인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북한과 핵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태도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이래서는 정부가 주장하는 ‘남북관계와 핵 문제 해결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수 없다.
대북 압박 국면에서는 선 핵폐기 정책의 문제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협상 국면에서는 협상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되기 쉽다. 비핵·개방 정책을 바꾸고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북한·미국 등 관련국에 대한 발언권을 높이지 않는 한 이번과 같은 일괄타결안은 현실성을 갖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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